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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잉글리쉬 페이션트 [The English Patient] 본문

합의된 공감

잉글리쉬 페이션트 [The English Patient]

레니에 2014. 6. 14. 12:59

 

살면서 주야장천 들어온 사랑이라는 말,
참 진부하고 성가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체념하게 되는 많은 것들 중에

사랑도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사랑 또한 감정적 대가를 지불하는 불안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이유로 사랑을 포기하거나 과소평가하며 사는 것은 더 힘든 일이겠지요.

 

 

 

 

 

한 시대가 아니라

바다가 사막이 되는 유구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라도 할 것처럼 유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할 땅을 비웃듯,

더는 무엇을 기대하기 힘든 사막을 벗어나려는 듯.

 

 

 

 

 

그러나 그들은 격추되고 맙니다. 

지상에서 구성한 촘촘한 이념, 도덕, 국경이라는 화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 살아남았지만,

살기 위해 애쓰지 않는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소한 장면 같아도 영화에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상징성이 눈에 띄는데

한나가 동료에게 데이트 비용을 빌려주는 이 장면도 언제든 일어날 법한 일에 주목하게 합니다.

 

 

 

 

   삶이 지속될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순간의 다음 장면이,

 

 

 

폭발 사고로 인한 죽음인 것처럼.

 

 

 

 

아무리 애써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다음 장면이란 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서야 돌아보고, 후회하며

관습적인 태도를 수정하려 합니다.

 

 

 

감독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남자는 역사를 말하지만,

한나는 그런 건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과일 한 조각을 나누어 먹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를 잃은 슬픔이 진행 중인 그녀이기에

지금 맛보아야 하는 삶이라는 참맛이 거창한 역사는 아닐 테지요.

 

 

 

세상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거부하고 창백한 눈빛과 회의적인 말투를 던지는 남자.

 

누구나 그렇듯,

알마시는 좋은 자질과 더불어 약점도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갖지 못했던 배우가 드디어 관객 앞에 섰습니다.

 

 

 

 

 

은밀한 표정이 담긴 순간에는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매개와 기회가 들어 있습니다.

 

  은유는, 인식하고 이해하는 자만이 풀 수 있는 암호입니다.

 

 

 

 

카라바지오의 등장으로 좀 더 내밀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카라바지오도 한나처럼 상처투성이지요.

모진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런 몸으로 우린 살아갑니다.

 

알마시와 한나, 깁과 카라바지오의 경우처럼

비슷한 상처는 서글프기도 하지만 묘하게도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해 제일 먼저, 가장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일 겁니다.

 

무심한 듯 포장해 온 자기 내면 구석구석에 얼마나 큰 열정과 갈망과 결핍과 기대가 감춰져 있었는지를,

사랑이라는 빛이 드리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니까요.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

 

 

 

 

 

 

 

 

 

사람들로 무성한 삶이란 숲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놀라는 일,

그것은 보물찾기 후에 주어지는 경이로운 혜택이기도 합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말,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상처와 눈물이 있습니다.

 

한나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모두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세계는 참혹한 세계 대전보다 더 치열한 삶이라는 전쟁을 각자의 방식으로 치르는 중이니까요.

 

 

 

 

다시, 회상 장면입니다.

 

극비리에 지도 제작을 하기 위해(마치 자기 삶의 위장처럼) 떠나는 클리프턴에게 알마시는 부인에 대한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클리프턴은 캐서린에 대해선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막의 지형을 정밀하게 탐사하는 그는,

한 사람 내면의 지형은 몰랐던 셈이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탐사하고픈 동기 자체가 없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사막은 하룻밤 새에도 지형이 달라지는 곳인데도요.

 

사실, 미처 알지 못하는 삶의 어떤 부분을 다 안다고 믿는 이 지독한 확신은

우리가 너무 쉽게, 너무도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한 여자의 시점에서 멀어지는 남자와

돌아서 다가올 남자.

 

 

 

 

 

폐허 속에서 부서진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감독은 어쩌면 흩어지고 부서진 삶의 화음을 끌어모아

자기 주위에 울리는 한나의 긍정을 읽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음표가 그럴듯한 그랜드 피아노에만 들어있는 건 아니며,

가장 뛰어난 연주는 공연장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듯.

 

 

 

 

거짓말을 가장 싫어한다는 여자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를 남자에게 묻습니다.

알마시는 소유, 소유당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어쩌면 그는 두려웠을 테지요.

사랑의 가치와 더불어 그 변화무쌍함을 알았기에.  

 

 

 

 

 

 

아니라고 부인해도,

이미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에게로 너무 가까이 와버렸습니다.

 

모두가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제국주의를 지향하는데,

그들은 두 사람만의 협소한 국가인 사랑의 영토를 세우고 기꺼이 그 일원이 되지요.

 

 

 

 

 

 

킵이 한나를 위해 그림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마치 이런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남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 발견하고 느껴보라고.

 

 

 

 

 

어쩌면 우리는 나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찾기보다는,

나와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를 알기 위해 애쓰는 건 아닌지.

 

그렇게 삶의 순간을 허비하지는 않는지.

 

 

 

 

비를 맞고 싶다는 알마시를 들것에 싣고 빗속을 달립니다.

 

이 장면은 그 무엇으로도

행복할 수 없는 알마시를 위한 배려이기보다는 

우리가 삶의 순간을 어떤 애정을 갖고 대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무수한 설명이 아니라

 단순한 실천이니까요.

 

 

 

 

 

인생이란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이 장면처럼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모두가 바라던 종전 소식을 듣던 날

하디는 폭발사고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매덕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알마시.

 

매덕스는 자살합니다.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개인사에도 단순히 계량화할 수 없는 개별적 내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내전에서 승리하려 애쓰지만 때로 패배하기도 합니다.

 

 

 

 

클리프턴이 비행기에 아내를 태운 채 알마시를 향해 동반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규칙을 어기는 무엇인가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기준으로 이해하고 취급하고 해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클리프턴은 파멸을 선택합니다.

 

그는 감정에만 충실하며 과연 우리에게 무언가를 판단할 자격이란 게 있는지를 숙고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마음이 어떨지.

 

세계대전 같은 굵직한 사건만이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책에는 비록 기록되지 않아도,

이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도 거대한 역사입니다.

 

 

 

 

 두 사람은 믿지 않았겠지만

살아서 나눈 마지막 키스입니다.

 

우리 삶이 최악의 상황에 놓일 때 우리가 선택하는 처방전과 치료약은 과연 무엇일까요.

 

 

 

 

 

3일을 걸어가서, 3시간 만에 돌아와 당신을 구하겠다고 약속한 남자의 뒷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사랑이 주는 지속적인 고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랑에 전념하길 바라는 우리의 바람이 투영된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이 짧은 순간도 살아서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대면이었습니다.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보내는 게 서운해서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과의 이별은 석양을 닮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자기가 살아있음을 목격하는 일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요.

 

제 멋대로 읽고 마는 타인의 슬픔이지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캐서린이 캄캄한 동굴에서 글을 남깁니다.

 

 

 

 "우린 죽어요, 죽어가요.
우리가 맛본 쾌락들이, 우리가 들어가 강물처럼 유영했던 육체들이,
이 무서운 동굴처럼 우리가 숨었던 두려움이.

 

이 모든 자취가 내 몸에 남았다면 우린 진정한 국가예요.
강한 자들의 이름으로 지도에 그려진 선이 아니에요.

 

당신은 날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나가겠죠.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예요.
그런 곳을 당신과 함께 걷는 것
친구들과 함께. 지도가 없는 땅을.

 

전등도 꺼진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한나에게 안락사를 부탁한 알마시의 임종 장면입니다.

그는 캐서린이 죽음 직전에 썼던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 글을 들으며 눈을 감습니다.

 

그의 삶에서 백작의 명예처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많은 것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 그녀라는 듯.

 

 

 

 

 

영국 비행기에 적국인 독일의 기름을 넣고서야 마지막 비행을 합니다.

마치 우리 삶에 투입되는 모든 요소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듯.

 

완전한 삶이 무엇인지 누구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삶의 불가피한 유한성 앞에서 각자의 우선순위도 다르겠지요.

 

그러나 이런 질문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이 생에서 우리를 덜 외롭게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충분히 잊히는지.

충분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건 무엇이었는지.

 

 

 

 

 

 

격렬한 파동도 결국은 침묵으로 귀결되겠지요.

아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없는 사막의 모래처럼 변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경험으로 상상하고 공감하며 

인생의 영토를 조금씩 넓힙니다.

 

무의미에 파멸되지 않는 유의미한 존재로 끝끝내 살아남지요.

 

 

 

 

 

우리에게 있는 어떤 고결함으로 알마시와 캐서린의 선택과 결함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의 욕망만을 정당화하는 이기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조롱해야 하는 것은 타인의 사랑과 삶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과 관념, 들키지 않게 잘 감춘 욕망과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돈, 명예, 부동산 등등의 여러 목록 중에 사랑은 과연 몇 번째일까요.

 

많은 사람의 믿음과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알마시와 캐서린, 그리고 한나를 생각하며 이렇게 쓰고 싶네요.

 

당신과 내가 더 나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랑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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