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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의심을 의심하다- 다우트 본문

합의된 공감

의심을 의심하다- 다우트

레니에 2016. 4. 8. 17:59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는 영화를 선택할 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인 것처럼.

 

다우트는 연극 등을 통해 이미 알려졌지만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비올라 데이비스의 열연을 보는 즐거움은

작품의 명성 못지않다.

 

 

 








 

 


 어떤 판단은 객관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좌우된다.


논쟁과 대립은 무언가에 대해 규범적 판단을 내렸을 때 시작되고

그때부터 우리의 상호존중은 사소한 이유 등으로 그 기반을 잃는다.



 원장 수녀는 변화를 부당한 압력으로 생각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낯선 것을 거부하고 익숙한 것에서 얻는 만족을 향유하며 안주하고픈 심리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일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주 자신의 화영연화를 그리워하듯이 아무도 타락한 적 없는 에덴동산을 꿈꾼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이 설정한 이상적인 과거의 한때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녀는 극중에서 자주 창문을 닫는데

이는 변화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며 막힌 생각을 다시 닫는 것과 다름 없다.

 

사람이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고 교정할 여지를 열어두지 않으면

기존의 사유 습성에 갇힌 채 무언가와 멀어진다.



 

 

 

 






 



플린 신부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신 이외의 것이 더 필요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흐르는 강물처럼>에서의 '브래드 피트'와 닮았다.


브래드 피트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낚시법을 거부하지만 

낚시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왼손이 뭉개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지만

전통이라는 틀 밖에서 자신만의 낚시법을 창조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었다.  

















수녀들의 식사 장면이 엄숙하다.


맹목적인 지향은 무언가를 참고 견디게 한다.

일상이 단지 의무와 인내만을 요구할 때 삶에 진정한 내 몫의 기쁨과 의미가 있을까.


이 장면에서는 보통의 삶도, 생의 비루함을 도덕적 정당성 등으로 감추며

자기 위로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드러내지 않는 그 상처를 위로받기 위해 종교를 다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지도.













원장 수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믿음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밥을 먹는다.


윤리적 우위에 대한 우월감만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 사람은,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한다.

삶에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삶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한 여인이 자기도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친구와 험담을 했다며 고해성사를 하러 와서 물었다고 한다.


"남에 대해 수군대는 것이 죄인가요?"


그러자 신부는 "자매님은 집으로 돌아가서 베개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십시오.

그리고 칼로 베개를 찢은 후에 다시 저에게 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여인이 그렇게 행한 후에 다시 고해성사하러 오자 신부가 물었다.

"어떻던가요?"


"깃털이 날렸습니다.

온 사방에 깃털이 날렸습니다, 신부님!"


"자, 그럼 이제 다시 가서 바람에 날려간 그 깃털들을 다시 담아오십시오."


"그건 불가능한데요. 깃털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바람에 날려가 버렸어요." 


신부가 말했다.

"남에 대한 험담도 그렇습니다."
















원장수녀의 경우처럼 자기 신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배타적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플린 신부가 연관된 일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고픈 그녀 안에서 발생한 것일 수 있다.

그녀는 자기를 방어할 이유가 필요했으니까.


대개 확신은 근거가 모호한 개인적 편견을 자양분 삼아 자라나고

선입견이라는 잡초가 무성한 대지는 다른 성장을 낳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 혹시 내릴지도 모를 비에 젖지 않기 위해 

자기를 보호할, 자기만의 우산을 꽉 붙잡고 있다.













그렇다고 원장 수녀가 전적으로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공동의 선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자 했던 마음은 원장 수녀와 플린 신부 양쪽 모두 분명하고 진실하다.



인간은 여러 세대를 통해 축적된 경험으로 삶의 효율성 향상을 도모하니까.















움베로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빌려 말하면,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면,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다른 누군가를 죽일 수 있으니까.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알고 있는가?

안다고, 그저 의심 없이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심과 확신은 언제나 내 것이지만 진실은 언제든 내 것이 아닐 수 있다.


영화는 원장 수녀가 자기의 '의심을 의심'하며 끝난다.


바로 그 때 관객은 신부의 결백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는데

이는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안에는 의심과 확신이라는 자기만의 신전이 지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린 신부와 원장 수녀의 대립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등이 함축된 느낌이라

그 본질적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성공을 거둔 두 관점인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된다.


성마른 현실 속에서 판단의 균형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진보란 무엇일까,를 자문하고 

스스로의 배타성, 즉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게 사소하지만 가장 큰 진보라고 답해본다.


  또한 보수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자신의 판단을 남용하지 않은 채

변화와 안정에 대한 주장과 견해를 적절히 분배하고 유지하는 합리적인 태도라고 답해본다.



누구나 알듯이 많은 일은 '맞다'와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다.

같거나 다르다의 문제다.


가치판단을 할 때 적용하는 기준이 제각각이듯이, 어떤 부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서로 배타적인 진보와 보수만이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 주면서 

전체주의로 나아가려는 관성을 견제할 수 있다.


세상은 힘있는 양극단 중 어느 한쪽이 좌우할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중간이라는 완충지대도 필요하며 

우리 삶 또한 현명하게도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은 채 양쪽 모두를 필요로 한다.











- 오래전에 썼던 리뷰를 공개로 전환하면서 의문을 갖는다.

이 짧은 리뷰에는 얼마나 많은 주관적 선입견이 내포된 것인가를.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들로부터 나는 고립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세상에는 수녀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들도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설사 아무리 확신이 든다고 해도 그건 감정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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