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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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공감

칼에 지다 - 아사다 지로

레니에 2016. 3. 13. 17:59





"여기를 넘으면 인간 세계의 비참함, 넘지 않으면 이 몸이 파멸."

기원전 49년,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원로원에 맞서 정치체제를 개혁하려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한 말이다.
역사에서 늘 위대한 인물로 조명되는 그다운 언변이다.


그로부터 약 1,900년 후의 일본,
메이지 유신을 앞둔 막부 말기.
결과로 말하자면 카이사르에는 비할 데 없이 하찮은 사람이
하잘것없는 명분인 '제 가족을 굶주림에서 구하기 위해' 루비콘 강을 넘듯 탈번(脫藩)을 한다.

그는 가난을 베지 않으면 가족이 베이는 상황이기에,
다만 빈곤이라는 시퍼런 칼날로 제 가족을 위협하는 '불합리'라는 적을 베기 위해 자신에게 강요된 명분을 과감히 버린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카이사르는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해 원로원에 대항했지만,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홀로였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향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정면대응 했다는 점이다.














칼은 무언가를 분리한다.
그러나 인간 대부분의 삶이란, '밥벌이'라고 흔히 불리는 생활의 엄정함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제 등에 속내와는 다른 생활을 짊어지고,
제 식솔들을 위해 칼바람을 맞는다.
인간의 연약한 살에 예리하게 파고드는 칼날을 묵묵히 받아낸다.

요시무라 간이치로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의'를 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의'를 구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혹독한 가난만큼 지독한 전쟁은 없을 테니까.

가족이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상황에 부닥칠 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방어선을 구축해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영토는 권력자의 국가나 
주군의 영지와 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님을 그는 알았다.

누구나 상처 입으며 살지만,
여차하면 사방에서 날아들 세상의 칼날로부터 급소만큼은 피할 수 있는 갑옷을 제 가족에게 입혀주려는
과업을 수행하며 사는 일이 결국 부모의 길이고, 아비의 길이며, 

어미의 길이자, 사랑하는 자의 길이라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는 비록 삶이라는 치명적인 칼날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더라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제 가족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자기 살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어렵지만, 세상에 그것만큼 충직한 충(忠)은, 그것만큼 현명한 전쟁은 없다는 것을 
그와 함께 어쩌면 우리 또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다 닳아빠진 남루한 칼에 제 기량을 맞추며 명검들과 맞서 싸웠고
무사도처럼 그럴듯한 구호로 위장하지 않은 채 "남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애초부터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생각하며 그는 고백한다.

"너희야말로 나의 주군이었다.
왜냐, 나는 너희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 때든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니, 어떤 각오도 필요 없이..."













'아사다 지로'와 '위화'는 닮은 점이 있다.
그들의 소설은 무척 재미있고 가독성이 좋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처럼 니체를 읽어야 하는 부담도 없고,
작가의 작법 스타일에 애써 적응해야 하는 고충도 요구되지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가 '강자의 매력'에 끌리는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는 역사적 사실만을 취합했다면,
위화는 강자와 약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인간의 삶에 우열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아사다 지로 역시 카이사르를 '창조적 천재'로 떠받들며 편애하는 시오미 나나미와는 다르게 
모든 인간에게 역사는 있지만, 다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카이사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존재'일 테지만.


여하튼, 카이사르가 로마의 영토와 권력의 안정을 추구했다면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자신의 안전과 명예보다는 가족의 생존이라는 신념을 위해 분투했다.

세상에는 더 큰 신념을 위해 제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숭고한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제 자식을 지킬 권리, 제 사랑을 보호할 권리일 테니까.
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현실만큼 참혹한 전쟁은 없을 것이다.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삶에 나를 위해 희생한 누군가를 투영하지 않더라도
문득 속을 쑤시는 지점이 많았다.

아울러 전쟁을 불사하며 거부했던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오히려 당사자들의 생활이 진보하는 역사의 모순에서
우리 근현대사가 명료하게 솟아올랐다.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아들이 아버지 세대에는 권력이 독점했던 쌀을, 
마지막까지 차마 먹지 않았던 그 밥의 씨앗인 볍씨를 연구해서 세상에 기여하고 
딸과 사위가 타인의 상처를 치료하며 세상과 화해하는 점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 과정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오노 지로우에몬의 우정과 사스케의 신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삶이란 결국 사소한 듯 보이는 행위의 유기적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언젠가, 일부 대학생 중에 "가장 효율적인 재테크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유산을 빨리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다만 지식으로, 실용적인 세상에 대한 적응력만을 지나치게 키운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하찮게 보이는 삶들이 그 하찮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치른 고투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교양은 없다.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굽은 등을 연민할 줄 아는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연민이 연민만으로 끝나지 않게 행동하는 일은 스펙을 쌓는 일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마담 보바리'의 문학사적 의미를 외우는 것이 아니며,
만들어진 결과나 만들어진 가치만을 무턱대고 신봉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정작 중요한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부르투스, 너마저..."
세상의 중심이었던 패권국 로마의 모든 것을 가졌던 황제 카이사르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사람이라는 칼'에 졌다.
하지만 자신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권력을, 유럽 곳곳에는 흔적을, 역사에는 이름을 남겼다.

하찮은 인간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삶이라는 칼'에 졌다.
그가 남긴 것은 검 한 자루와 '동전 열 닢'뿐이었다.
죽음의 고통을 덜지 않으면서까지 아들에게 남긴 명검에 더는 피가 묻지 않기를, 
동전 열 닢으로는 그 하찮은 돈만큼이라도 가족의 가난이 덜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끝내 등을 돌린 삶 말고는.

물론 한쪽은 논픽션이고 다른 한쪽은 픽션이지만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들이 선택한 부정확한 사실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일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카이사르의 삶 또한 과장된 픽션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도 어떤 이의 삶이라는 역사를 사소하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잘못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약해서 나는 쓴다.


살아가는 일은,
무작위로 태어나,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무의미한 고투를 요구하는 삶이라는 우연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라고.


각설하고, 작가는 썼다.

'싸움에서 이긴 쪽이 반드시 정의는 아니라고...'




ⓒ 박대홍










-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사쿠라 피는 교토에서 출발해 겨울 눈을 다 녹이지 않은 채 간직한 모리오카를 향하고 싶다.

반대의 여정이어도 좋겠다.


검색해보면 마치 가본 듯하겠지만 하지 않으련다.

오롯이 마음에만 두었다가, 처음 보는 풍경의 설렘을 반드시 맛보련다.

결과가 기대 이하의 실망이든, 기대 이상의 찬란이든,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든 나는, 후회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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