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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주어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외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본문

합의된 공감

주어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외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레니에 2017. 1. 6. 11:59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힘껏 건너뛴다.

곤경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삶의 모든 순간은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일까,

영화 포스터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보는 것 같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생겨 우스운 꼴이 되기도 하고,

삶이 뒤집히는 '결정적 순간'을 체험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

 

 

영화는 보여주지 않고 들어간다.

소리만 들려주는 오프닝을 통해 경청의 어려움을 드러내는데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으로 전해지는 세계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

 

주관을 절제하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

어느 경우에 주어와 접속사를 생략하면 문장과 문장의 관계가 오히려 경쾌하게 풀린다.

그런데 주어가 생략되는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아예 상실되는 세계도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 세계의 부조리함에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주어의 상실을 강요하는 세계에서의 '나'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어가 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처지가 달라질 것이다.

 

조류인플루엔자로 삼천만 마리의 목숨이 살처분된 지금의 상황에서도 달걀값만을 걱정하며 무감각하듯이.

닭들이 처한 절체절명의 실존은 아주 하찮은 에피소드로 다루어질 수 있다.

입장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져서 한 사람의 불행은 그저 여러 불행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어쩌면 세상은 그런 모순이 가득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신발 깔창 생리대'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과 휴지를 사용한다는 팩트였다.

지어낸 시나리오 같은 뉴스를 통해 동일한 세계에 살아도 서로가 서로의 처지에 대해 얼마나 모를 수 있는지를

새삼 확인했는데, 싱글맘 케이티가 훔친 물건도 겨우 생리대였다.

 

희망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긍정하는 것과 무턱대고 아무거나 긍정하는 태도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복지라는 개념이 시혜보다는 권리의 관점으로 진화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무상'이라는 자극적 언어를 동원하면 시스템과 개인 중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합리적 의문은 건너뛴 채 모든 가난의 원인은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 탓으로 귀결된다.

 

영화 속에서 복지를 시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듯한 관료들의 태도는 디지털적이다.

그 세계는 상실의 정도를, 질병의 분량을, 가난의 크기를 돋보이게 증명해야만 한다.

 

반면에 식료품을 지원하면서도 '쇼핑'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상자가 최소한의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하는

민간단체의 배려는 아날로그적이다.

쇼핑이란 말은 수치심보다는, 주어가 선택할 술어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듯 보인다.

 

 

 

 

 

 

 

 

 

 

'나는~'을 쓰는 걸 촌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세상의 많은 일은 '나는'을 생략하면 도저히 써지지 않는 문장과 다르지 않다.

 

다니엘은 비록 시대의 변화에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자기만의 관점과 문체를 가진 작가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화 속 관공서 직원들처럼 타인의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

 

다니엘은 자신이 쓴 인생과 노력을 혹평하면서 지나친 해석의 횡포를 부리는 평론가들과 맞선다.

그들은 다니엘이 성실하게 써낸 삶을 '실업자'라는 한 단어로 아주 친절하게 수렴하는데,

'인간'의 문제보다는 단지 '실업'만을 다루는 듯한 기계적 응대 앞에서 다니엘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진다.

 

서로 다른 방식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뒤섞여 상황이 복잡해질 때는

디지털 시스템의 효율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차분히 들어주고 읽어주는 아날로그적인 태도 또한 요긴하지 않을까?

관계가 어긋날 때일수록 분석적인 태도보다는 경청이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하듯이,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다른 면을 모르게 된다.

 

 

세상에는 사람이 만든 다양한 형태의 시스템이 있지만,

사회구조의 견고성을 보장하는 기초는 언제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기본 단어다.

 

반복되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생에 대한 기이한 짝사랑이 계속되는 일 또한 

'나'와 '당신'이라는 주어가 있기 때문이다.

 

한줄기 빛이 어둠 속에서 길을 뚫어 벽에 닿으면 영화가 시작된다.

내가 아직도 극장에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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