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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역사는 최적의 경로를 모른다, 다만 무턱대고 나아갈 뿐 - 호모 데우스 본문

합의된 공감

역사는 최적의 경로를 모른다, 다만 무턱대고 나아갈 뿐 - 호모 데우스

레니에 2017. 6. 19. 10:59

 

그곳에 다녀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 얘기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학자든 독자든, 우리가 닿은 곳은 고작 눈앞의 유적이나 책, 상상과 해석이 더해지는 뇌까지의 거리뿐이다.

그 짧은 거리를 붙들고 거시사에 매달린다. 과연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고 앞날은 어떠할지를.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도 '잘못 봤네' 싶은 때가 많은데 하물며 역사는 어떨까.

 

 

 

 

 

 

 

 

 

"왜 우리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불과 2세기 전까지 석기 시대에 살았던 뉴기니인이 했던 이 질문은 

넌지시 역사를 기웃거려본 누구나 해봤음직 한 합리적 의문이었다.

 

이를테면 '왜 한 대륙에서는 문자와 철기를 가진 문명으로 진보했는데 

다른 대륙에선 고작 석기를 들고 수렵 채집하는 사회에 머물렀을까?'

 

세계가 불균형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된 불가피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 질문은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현대의 불평등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된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어느 소년이 자라면서

'나는 왜 유럽이나 북미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처음부터 가난합니까?'

'왜 우리의 출발 선상은 판이하게 달랐고 운명 또한 달라집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격차의 이유가 흔히 말하는 유럽인들과의 생리학적 능력의 차이 때문이라고 대충 얼버무려야 할까.

 

 

 

<총, 균, 쇠>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유전학, 진화생물학, 언어학,지리학등을 아우르며 

풍부한 예화와 광범위한 사례를 검토한 과학적 결과물을 내놓았다..

결론은, 환경의 차이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었다.'

 

그 결론은 그동안의 어설픈 우리의 짐작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집단이든 개체든, 차이를 촉발시킨 원인은 분명 동일했다.

 

그러니까 특정 환경은 진화에 더 유리했고 그 과정은 반복되었으며 역사에 누적되었다는 뜻일 게다.

 

자질보다 환경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면 종이든 개체든,

옆집 김 군이나 아래층 박 양이나,

성공에 유리한 선행 조건을 선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각자가 목표에 접근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환경이 자질의 성장을 돕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총, 균, 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유발 하라리'도 질문을 가졌다.

 

"아프리카의 별 볼 일 없던 동물인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나?"

 

달리 말하면, 인류사의 전환점이 된 현생 인류의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는 '인지 혁명, 농업 혁명, 과학 혁명' 등을 결정적 키워드로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다면 역사의 순차적 진행만을 기술한 따분한 개론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서로 무관한 듯 보였던 역사의 단편들을 모아 거시사로 모자이크한다.

생물학과 역사학 등을 활용해 인류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고 분석하는 관점이 매우 흥미롭다.

 

예컨대 농업혁명을 통해 인간은 수렵 채집민에서 

농지를 경작하고 정착하는 정주형 사회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식량 생산이 인류의 진화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지식의 나열은 이미 역사 교과서로 경험했다.

하지만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게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통찰은 무척 신선하다.

 

이 관점은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실마리다.

 

이런 인식은 독자가 현대의 인간이 스마트폰이나 자본을 활용하고 관리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것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과의 유사성을 비교하게끔 한다.

 

 

멸종을 비껴간 동물의 처지도 살펴본다.

가령 돼지나, 닭, 소와 같은 가축화된 동물들은 현인류에 의해 멸종된 메머드와는 운명이 달랐다.

육류 산업이라는 경제적 관점에 의해 태어나 번식되다가 또 다시 단 하나의 경제적 관점에 비춰

효율성이 정점일 때 도축된다.

 

인간이 산업화한 동물들의 개체 수는 자연상태와 비교하면 크게 늘었다.

하지만 많은 동물은 꼼짝도 할 수 없는 닭장에서 제대로 날갯죽지 한번 펴지 못하고 달걀만 생산하다가 

단 몇 달 만에 도살당해 컨베이어 벨트에 실리는 닭의 처지와 차이가 없다.

 

결국, 인간이 늘린 것은 종의 생물학적 개체 수가 아니라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물들로 전락한 가축의 숫자였다.

참고로 자연 상태에서의 닭의 수명은 7~12년이다.

 

우리 종의 기준에서 보면 '호모 사피엔스'는 강했다.

지금도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종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시킨 인간은 가장 치명적인 종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 서문에서 

'몸과 마음은 21세기 경제의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총, 균, 쇠>에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라며 썼다.

 

'상황은 변하는 것이며 과거의 우위가 미래의 우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 'Everything changes.'

 

<호모 데우스> 표지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유발 하라리의 자필 문구인데

이 책의 부제 또한 '미래'의 '역사'라는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안고 있다.

 

 

 어쩌다 재래시장에 갈 때 생각했었다.

우리는 가격을 놓고 인간이 인간과 흥정하는 마지막 인류이겠다고.

 

햄버거도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데 익숙해졌는데 얼굴을 마주하는 거래는 한참 뒤처진 방식 같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비유기체인 인공지능이 유기체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건 더이상 가정이 아닌 현실이다.

기술 진보와 변화의 속도는 과학자들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빠르다.

 

머잖은 미래에 지적 설계의 산물인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자기들보다 매우 열등한 위치에 놓인 인간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까?

 

우리가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했던 동물들에게 해왔던 행태를

똑같이 당하지 않으리라 낙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목적에 맞게 가축을 인공수정 시켜 우리 뜻대로 선택하고 이용하다 도축했지만,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은 인간의 윤리가 작동되는 알고리즘 안에서 인간을 존중하며

우리의 운명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협상력은 철저히 무시당할 것이다.

딜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비유기체에게 멸시당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과연,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사물인터넷이 창조하는 세상에서의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고 했지만

어쩌면 미래의 역사는 '행복이라는 형식을 가장하지만 실제 내용은 슬픔인 모순적인 세상일지도 모른다.

 

감정이입도 의인화도 없이 모든 것을 데이터로 취급하는

맞춤형으로 설계된 욕망안에서

딱 맞춤하게만 살다간다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의 검증이 그러하듯,

미래에 대한 예측을 검증하는 일 또한 먼 미래의 일이다.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을 때 감명을 받았던 대목도 지식이 아니었다.

확인이 불가능한 과거와 미래를 설명해내는 방식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을 다른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세월을 이겨내는 이유도

 지식의 적합성이 아니라 전달 방식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 행성에 단순히 사람만이 살았던 게 아니었으며, 사람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만이 살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 인식은 과거 대륙의 경계를 넘고 현재의 모든 국경을 넘으며 태양계의 한계마저 넘어선다.

 

그동안 광범위한 역사를 논한 많은 책이 제국과 거인의 흥망은 다뤘지만

우리 모두가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만큼은 침묵했다.

 
칼 세이건과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중요한 무언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한 번쯤 숙고함이 마땅하지 않냐고 묻는다.
이를테면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불균형과 우리 종의 폭력성 등을.
 
 

'유발 하라리'가 책의 각 부와 장과 단락마다에 사유의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고 알맞을 때에 수확해서 독자에게 배송한 솜씨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이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탁월함이었다.

 

그들은 시대는 달랐지만 과학을 세상에 내놓는 데 비과학적인 문학이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았던 것 같다.

우리가 비본질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결국 삶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듯이.

 

 

나는 역사를 모른다.

미래에 대한 식견도 없다.

 

다만 개인이나 역사가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는 있지만, 

최적의 경로는 모른다는 사실만큼은 안다.

 

무엇을 만날지는 모른 채 

무턱대고 어딘가로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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