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본문
화면이 어두웠다.
마치 새카맣게 타 숯덩이가 된 마음 같았다.
주인공이 영화를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다.
입만 열면 나올 소리가 상당히 절제됐다.
그 대신에, 대사보다 더 명확하게 들려오는 건 주변의 소리였다.
파도와 바람 소리, 옆방에서 들려오는 벽간 소음과 일상의 이런저런 소음들이 의도적으로 증폭되었다.
그것은 소음이 아니라 삶의 육성이었다.
그 소리 때문에 영화는 불쾌한 관념이 아니라 차분한 현실이 된다.
잘 연출한 미장센이 유미주의나 형식주의로 보이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별난 서사 없이 시종일관 차분하게 진행되는 영화가 공허해지지 않는 까닭도
그 생동하는 육성의 자리매김에 있었다.
아울러 돋보인 건 뭐든 하나로 묶는 단단한 끈을 사용해
슬픔을 서둘러 진압하려 하지 않는 감독의 진중함이었다.
▲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나직한 다다미 쇼트를 보는 듯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도 닮았다.
이 특별함이 특별한 건 아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보고 지나치는 일상의 부스러기다.
▼ 소모적으로 흘러가는 게 너무 아까워 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은 장면이 많았다.
한 가지만, 딱 한 가지만.
모든 영화는 머뭇거림 없이 끝을 향해 걷는다.
그것은 유일한 길이다.
저마다의 인생에는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는 비공식적 통로가 존재한다.
그 좁은길에서 누군가는 입을 다물고
또 누군가는 잠을 뒤척이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감춰진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능력이 조금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 그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자명함이 수시로 서늘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견뎌낸 결과가 지금의 자신이다.
'키키 키린'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이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근작들은 구체적이었다.
홍상수 감독이 삶의 위선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듯 그 또한 일상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그 변주도 복잡하게 유쾌하지만, 첫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도
사랑하는 이에게 진지하게 쓴 편지를 읽는 듯한
따스함을 느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세계의 자디잔 것들의 안색을 살피는 감독의 태도가 곡진하다.
'합의된 공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 화분 - 김정용 (0) | 2017.10.12 |
---|---|
어떤 부름 - 문태준 (0) | 2017.09.22 |
처처불상 - 도종환 (0) | 2017.07.04 |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 문태준 (0) | 2017.07.02 |
금요일 - 이상국 (0) | 2017.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