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구시렁#574 [하루 공책] 본문
#1
8월의 마지막 날 상현달 까지의 거리는 대략 405,010km.
여기서도 너무 선명한 달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너는 도대체 얼마나 먼 것이냐.
#2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계획이든 부주의든, 알고서도 저질렀다면 참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거잖아.
그때는 부모라는 사람들도 철이 없어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모르고 낳았을 거야.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3
오후 한때 흐린 어느 날,
등을 둥글게 모은 초승달이 저녁 하늘을 발자국 투명하게 걸어갔다.
그 큰 하늘도 달 하나 살기엔 적당한 공간처럼 보였다.
가만 보니 내 달 옆에서
올바른 지점에 위치한 잘 닦인 별 몇 개도 반짝.
#4
신호에 멈춰 서서 바라본 사방이 문득 애매했다.
무사고 운전으로
착실히
주행거리는 늘리는데
정작, 나는 잘못 굴러가는 거 같아서.
#5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그린 호퍼의 네모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네모반듯하지 않고
서로의 속내만이 옆에 없는 듯이 있었다.
호퍼의 붓질은 그 사람들을 건들바람처럼 툭툭 건드리며 지나갔을 것이다.
성가시지는 않게.
어느 때는 생의 기하학이 어렵고 신비한 다각형이 아니라
물어보지 않고도 혼자서 풀 수 있는 단순한 사각형 구조처럼 느껴진다.
널찍하게 트인 가을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나도 골똘히 앉아 남들 다 한다는
숨이라는 걸 쉰다.
#6
이따금 가슴 저리며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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