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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마추픽추 본문

막쓴

마추픽추

레니에 2017. 10. 24. 13:59

C는 그때 스웨덴에 살고 있었다.
요령과 힘만 있다면 얼마든지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차갑고 단단한 겨울이 오랫동안 녹지 않는 곳이었다.

"나 지금 스웨덴이야."

동떨어진 곳이 필요했던 나는 
쉽게 빈자리를 찾을 수 있는 넓지 않은 카페에서 20크로나짜리 커피를 마시며 C에게 연락했다.
C는 팔짱을 끼고 지그시 노려보듯 잠시 말이 없다가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목적지가 어디야?"라고 물었다.

"잠시 머물 수 있다면 어디든 목적지지."
"여전하구나, 나른하고 시니컬한 태도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C가 왔다.
코트를 벗자 C의 탄력 있는 몸매가 매끈한 부츠와 모직 원피스 차림으로 드러났다.
C의 깐깐한 성격처럼 여전히 군살은 잘 정리돼 있었다.

"양심은 있는 사람이네, 여기까지 와서 나를 찾다니.
근데 언제 갈 예정이야?"

"한 달 후에.
만약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려 애쓰는 게 눈에 띄면 좀 더 빨라지겠지."

"올겨울을 이곳에서 나는 것도 아니고 한 달이란 말이지."
C는 투정 부리듯 입을 삐죽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음, 그럼 한 달 동안 떳떳하게 당신 마누라 해주면 되겠네."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인데!"


카페를 나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걸었다.
C가 예전처럼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꾸로 세운 느낌표를 닮은 긴 손가락을 포개어 맞잡자 손안에 옛날이 가득 고였다.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3일을 묵기로 예약한 호텔에서 한때 그랬던 것처럼 열렬히 사랑을 하고
또다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어때?"
C는 거친 숨소리를 정리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쓸어내렸다.

나는 대답을 잠시 물고 있다가 아니라고 답하고선
여전히 기억해서 좋은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두서없는 얘기들이 사방으로 확장되었다.
일본에서의 건축 여행과 빈에서의 미술관과 카페 여행, 방콕에서의 볶음국수, 
홍콩에서의 애프터눈 티, 스페인에서의 드라이브를 얘기했다.
C는 배시시 웃으며 듣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기억이 다르다며 따지듯 말했다.
어느 쪽이 기억을 윤색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들어보니 가장 좋았던 것과 가장 나빴던 것은 서로가 달랐다.


잉카제국의 마지막 도시 마추픽추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인간은 기상천외한 온갖 것을 만들고 그것들은 끝내 사라진다고.
후세 사람들은 밝혀지지 않은 신비로운 곳을 보며 추측만 할 뿐이라고.
그곳에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은 그 도시처럼 방치됐었다.

나는 정작 내가 챙겨온 말은 하지 않은 채
그녀의 검지 손톱 위 첫 번째 마디를 익숙한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그녀도 생의 모순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수분 가득 머금은 무거운 공기는 여기도 충분해, 너무 심각하지 마."


어느 해 여름 풀빌라 선베드에 누워
이름 없는 무수한 별이 수용된 밤하늘을 보다가 그녀는 문득,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하는 일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어서 기쁘다고 말했었다.

언젠가 우리가 지금과는 아주 다른 의미로 남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어차피 사랑하는 거 인색하게 마음 써서 좋을 게 뭐가 있냐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나 예쁘지 않아?"라고 안겨들었다.

"나 예쁘지?"가 아니라 "나 예쁘지 않아?" 
"그렇지?"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 라고 묻는 방식이 항상 나는 좋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한 달에서 9일이 부족한 날에 나는 스웨덴을 떠났고
3년 전 가을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랑이 불쾌하거나 아픈 기억으로 남는 것은 
사랑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자질구레한 갈등 때문이기도 하지만
헤어지는 때를 잘못 선택한 탓이기도 하다.


"돌아갈 날이 언제야?"

"한 달 후."

"돌아올 날은?"

"......"


"나는 언제쯤이나 당신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될까?
있잖아, 잉카의 마지막 도시 마추픽추에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면 어떨까.
당신에게 아무 연고도 없던 이 도시처럼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때, 왠지 멋지지 않아? "

그녀는 기발한 생각이라도 한듯 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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