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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에 2017. 10. 29. 19:18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보름째 같은 꿈을 꾸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반복되는 꿈 때문에 하룻밤에 몇 번씩 잠을 깼다.

그사이 체중은 5kg이나 줄었다.

 

 

그가 집안일 때문에 고향에 갔던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러 잘 먹지 못하는 술까지 마시고 잠들었지만, 여지없이 동일한 꿈을 꾸다 깨었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자다가 저절로 새어 나온 한숨 소리를 들은 그의 동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요즘 걔가 자꾸 꿈에 보인다."

 

그가 말한 여자는 그와 헤어진 지 십 년이 지난 옛 애인이었다.

두 사람은 십 대 후반에 만나 청춘을 다 쓰며 사랑한 사이였는데 남자의 동생과도 허물없이 지냈었다.

 

그가 최근의 일을 말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에 저도 봤어요. 어제도 봤고요."

그의 동생이 목소리에 걱정을 담아 말했다.

 

"형님이 이불은 안 덮은 채 약간 웅크린 자세로 모로 누워 자는데

같은 자세로 형님 등을 안고 있는 여자가 있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누구세요?"라고 물으니까 "나야 OO" 하고 얼굴을 돌리는데 형체가 없어서 식겁하다 깼어요."

 

남자의 동생이 말을 이었다.

 

"근데, 목소리와 분위기는 그 누나가 맞아요.

어제 얘기할까 하다가 참았는데 조금 전에도 같은 꿈을 꿔서 소름 끼치네요.

무슨 일 있는 게 아닐까요?"

 

 

 

그날 이후로도 꿈은 계속되었고 남자는 속수무책이었다.

 

꿈은 잠들기 전 방안 상태를 고스란히 재현하며 시작되었고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등을 껴안았다.

늘 그게 전부였다.

 

그때마다 남자는 여자가 껴안는 감촉을 생생하게 느끼며 놀라 깨어나는 일이 반복되었고 불면증이 생겼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보았고

그의 안색을 살피며 건강을 염려했다.

 

그는 무슨 일인지를 묻는 절친한 선배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다음날 남자의 선배는 태어난 시를 포함한 몇 가지 신상정보를 물었다.

사업상 와이프가 가끔 다니는 용한 점집이 있는데

자기도 점이라는 걸 우습게 봤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며 남자를 설득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봐. 

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일생 동안 그 역시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보아왔고 갖가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어왔다.

 

어찌 보면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인생 전부를 이성만으로 이해하겠다는 태도도 오만이었다.

 

 

"반드시 네가 그날 입었던 속옷이어야 하고 새벽에 태우래. 

다 태운 후에는 왼쪽 어깨너머로 준비한 동전을 던진 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장소를 떠나라고 신신당부하네."

 

 

남자는 며칠 망설이다가 선배가 일러준 대로 실행했고 

그날 밤부터 더는 그녀가 나타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

 

상황이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선배에게서 전해 들은 사연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소문을 들을 때까지

그녀는 찾아오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소문을 확인해본 뒤에야

무속인이 했다던 "가기가 싫었구나."라는 말을 떠올렸다.

대단하게 울 일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랬듯이,

헤어진 뒤에도 그들은 각자의 설움으로만 각자 울었다.

 

 

 

십 년의 연애를 정리하던 날 그녀는 "전화번호 바꾸지 마, 한 번은 찾아갈게."라고 했었다.

남자는 의연하게 구느라 정작 그 말의 깊이를 재어보지는 않았다.

그때가 그녀의 뜻대로 서로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쉬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언젠가 여자는 남자에게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부메랑을 던지는 장면이 좋았다고 말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부메랑은 돌아오지 않았대.

무기처럼 공격이 주목적이었니까.

 

근데, 호주 원주민들은 돌아오는 부메랑을 사용한 거야.

매를 대신해 새를 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자기가 던진 부메랑이 무언가에 부딪혀 추락하지만 않는다면 자기 쪽으로 돌아오도록 했대.

우왕좌왕하거나 전전긍긍하지 않고 서 있던 자리에서 차분히 기다린 거야.

 

나도 내 부메랑을 제대로 다루고 싶어."

 

 

 

믿기지 않던 일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누군들 사는 동안 여기저기서 부딪치고 꺾이지 않았겠냐고 생각했다.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 필요해서 찾아왔는데 서둘러 문을 닫아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부딪힌 부메랑이 돌아오지 못하듯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서 거듭 되살아나 반복되는 욕망이나 후회 같은 원형적인 궤도가 있듯이

생각보다 많은 불합리가 맞물린 세상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던 여자도 마침내 돌아와 

"그냥 잠깐이면 돼"라고 말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남자의 가슴 언저리가 뻐근했다.

 

 

삶에는 마치 부메랑처럼 반드시 한 번 정도는 되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믿기 힘들어 정신 나간 이야기로 치부하거나 한 귀로 흘려듣지만,

그것들은 살아 있는 내내 격렬한 형태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후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방문을 넌지시 열어놔도, 다녀간 정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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