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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토지> 송영광의 말 본문

합의된 공감

<토지> 송영광의 말

레니에 2018. 4. 25. 13:59

 

 

"맞는 놈 때리는 놈, 도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없어지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밥그릇 크기를 따져서 생긴 일입니까?

 

진주서 농청과 백정이 싸웠을 때도 이해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짓밟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의 본성."

 

 

(…)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 본성, 본성 말입니다.

 

밥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위냐 너가 위냐, 그것 때문에 더 많이 때리고 맞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구요.

 

재물이나 권력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등이면 굶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다 많은 재물, 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는 것은 실상 배고픈 것하고 절실하게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나고 호령하고 지배하고, 그런 걸 위해 권력과 재물을 가지려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얻은 것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다.

대체 그건 무엇일까요.

호령하고 뽐내고 남을 짓누르는 것 말 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일까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 잘난 사람들 걸핏하면 흔들어대는 깃발이지만요, 그것은 거의가 불순합니다.

우월감이 딱 자릴 잡고 있거든요.

지배를 예비하고 있단 말입니다.

 

깃발처럼 높이 솟으려는 의지가 있단 말입니다.

사실 그것으로 권력을 잡아왔구요.

정의니 팔굉일우(八紘一宇)니, 공영(共榮)이니, 침략자 왜놈들이 즐겨 쓰는 말 아닙니까?

 

과연 정의가 있습니까?

자유가 있습니까?

평등이 있습니까?

 

있어본  일이나 있습니까?"

 

 

<토지 16권. '5부 1권' 중에서>

 

 

 

 

 

 

 

 

 

이홍과의 만남에서 울분을 토하는 송영광의 말이다.

 

그는 강혜숙과 불같은 사랑을 했다.

그 사생활이 불거졌을 때 가장 문제가 된 건 인간 송영광이 아니라 백정 송관수의 아들이라는 그의 신분이었다.

 

추상적인 정의 자유 평등을 추켜세우던 사람들조차 은근히,

그리고 여전히 그를 백정으로만 취급했다.

 

그 사건 이후 심리적 내상을 입은 영광은 얼굴과 다리에 자해와 다름없는 상처를 남기며

내면과 외면 양쪽으로 불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니 그의 말은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거친 자기 옹호이자 변명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지만,

개인의 역사는 패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왜냐면 승자가 그렇듯 패자 또한 변명과 합리화로 자기 인생을 미화하고 왜곡한다.

 

 

살면서 이런저런 상처를 받거나 치명상을 입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생의 허무는 얼핏 보이는 게 아니라 수시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오히려 고민하는 게 아닌가.

누구나 자기 내면을 정직하게 직시할 용기를 잃을 때 인생은 비극이 된다.

 

 

꿈꾸는 희망과 실현 가능한 희망의 불일치는 삶의 보편적 부조리다.

그럼에도 남들만큼 살아볼려고, 남들만큼 잘하려고 다들 아등바등 한다.

제대로 진척되는 경우가 적어도

실망과 모멸에 어떻게든 대응하며 살아간다.

 

출생이 가져온 행운과 불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송관수가 살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 모두가 마주하는 문제다.

그런 동시성도 소설 『토지』가 가진 매력이다.

 

 

 

돈이면 사람의 마음도 너끈히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지켰는가,

나는 지금 어떤 잣대를 사용해 귀천을 구분하고 있는지를 자문하지만,

가치가 아니라 가격이 우열을 겨루는 세상을 살면서

과연 귀천을 구분할 엄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내게 있는지를 묻는다면 적이 민망하겠다.

 

 

송영광은 세상에서 받은 모멸을 그를 사랑한 영원한 자기편인 어머니 영선네와 아비 송관수, 

연인 혜숙과 그를 염려하며 지원한 지인들에게 상처로 되돌려주는 우를 범한다.

 

송영광처럼 되지 않을 의지와 분별이 내게 있는가.

내 안의 신념과 가치는 정녕 있을 만한 것인가.

아니 뭔가가 '있어본 일이나 있는가?'

 

잃을 게 많은 양 속으로 전전긍긍은 하지만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나는 영악하게 앞서 답을 찾았고 그 답에 너무 일찍 길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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