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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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공감

<토지> 강포수

레니에 2018. 4. 29. 20:59

 

어쩌면 귀녀의 생애가 끝나는 날 강포수의 생애도 끝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죽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 강포수는 귀녀와 더불어 있다.

옥중과 옥 밖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엄연한 법의 거리요 지척이면서 가장 먼 그들,

서로가 서로를 보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나 강포수는 일찍이 귀녀가 이같이 자신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

가랑잎 더미 위에 쓰러뜨렸을 적에도 귀녀는 강포수에게 멀고 먼 존재였었다.

 

강포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주받은 악녀이건 축복받은 선녀이건 그것도 강포수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줄 단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토지 1부 3권 중>

 

 

 

 

 

 

 

 

포수는 우연히 포착한 목표물을 조준하여 총알을 발사한다.

별당아씨와 도피하던 김환을 향해서도 총구를 겨누던 그 일방적 공격성이

큐피트의 화살로 변하여 역으로 강포수를 맞혔다.

 

명포수로 이름을 날리며 짐승의 숨을 단 한방에 끊어놓던 강포수의 상대는 하필이면 짐승같은 악녀.

 

그 불충분에도 불구하고 강포수의 마음은 '월선'의 사랑처럼 순수하다.

그는 포수에게는 생명과 다름없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듯 귀녀에게 발을 들여놓았고

귀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두매를 위해 익숙한 세계를 떠나고 기꺼이 목숨까지 버린다.

 

강포수는 두드러진 인물이 아니지만 잔잔한 반향을 남긴다.

강포수의 귀녀에 대한 사랑은 상호 매혹이 아니었는데

그 짝사랑은 인생에 두루 섞인 이율배반을 닮았다.

 

하지만 그는 한때의 사랑으로 남은 생을 충분히 살았고,

함께 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사랑이 있음을 증명했다.

 

다소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사랑하며 사는 게 좋은가,

아니면 사랑 없이 그냥 사는 게 좋은가.

 

어느 쪽이든 가끔은 지칠 것이다.

 

 

'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줄 단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언젠가 나도 사랑이란 것을 하긴 했겠으나

혹시 벌써 지는 꽃처럼 바삐 마음 거두며 사는 건 아닌가.

아니라고 적으려다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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