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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토지> 주갑 본문

합의된 공감

<토지> 주갑

레니에 2018. 5. 4. 08:59



혜관은 못 들은 척 강 언덕에서 강을 바라보며 목탁을 치고 독경을 하고 있었다.



"울퉁불퉁 돌대가리 중이 그래도 불경 욀 줄은 아는디."


주갑은 중얼거리다가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리고 조끼 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어 붙여물고 피어오르는 연기 속의 강 건너편 나무 한그루를 바라본다.


"참 세월 좋다. 이리 강물은 맑고 하늘은 높기도 헌디, 수수 알갱이 서너 주먹 넣고 끓이면 창자 채울 것을,

워찌 세상의 인심은 그리 험하든고.


고대광실 높이 앉을수록 인심이 험한 것은 무슨 이치며 계급이 높을수록 사람을 많이 직이야 허는 것은 무슨 이치며

배불리 먹고 힘이 솟아오르는디 게을러지는 것은 무슨 이치며……어린 자식 배고파 우는 꼴을 차마 못 보고 천지신명

원망허며 남의 곡식 훔쳤다고 이 뺨 저 뺨 맞고 아랫도리 벗어야 허는 것은 무슨 이치든고?

어하 이놈의 세상 언제 끝이 날꼬."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바람 타고 윙윙 울려온다.


"저놈의 미친 중 지옥이 없다면서 극락왕생 비는 거여?

사람은 모두 나면 죽는 것, 나도오 조만간에 이 세상을 하직헐 것인디,

워떠커럼 죽으까이?


사방을 바라보니 봄도 아니 멀고 저 뚝에는 샛파란 풀이 돋아나겄제잉.

그러나 내 인생은 추색이라, 헌 일 없이 가는 것도 원통허지마는 저승이 없고 보면 

불쌍헌 우리 부모 다시 만날 길 없으니, 강선상님은 어디 가서 또 만날 것이며, 기화아씨도 흙 속에서

썩어부리면 그만인가. 어헛! 아서라! 잡생각 고만 허고 가든 길이나 갈 것이여."



<토지 12권. 3부 4권 중> 









주갑은 자유한데,

중은 무슨 미련이 많은지 목탁을 치며 염불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길을 몰라 헤매는 살찐 땡중에 비하면 주갑은 비록 가사 장삼같은 먹물옷과 반들반들한 비단옷은 없어도 훤히 길을 가늠하고

혜관에게 그만 돌아가라며 넌지시 충고까지 한다.


어린 이홍에게 '하늘 보고 땅 보고 절기를 알면 세상 이치는 거기 다 있다'던 주갑은

열등감과 자책, 우유부단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이용과 김길상에게도 일갈했었다.



'이리 뵈야도 나는 내 근본 믿고 사는 사람,

세상에는 제 근본이 제일이어라우.


지 애비 지 에미가 제일 아녀?

개천에 빠졌거나 용상(龍床)에 빠졌거나,

하늘 밑에서 땅 위에서 사는 거는 다 마찬가지란 말씨.


마찬가지랄 것 같으면은 제 근본이 남만 못헐 것 없는 거여.'






목청 좋았던 그 사내, 청사초롱 들듯 한을 밝힌 사향가(思鄕歌) 부르며 험한 길 밀고 나갔을까.

세상을 조감하듯 생동하는 새타령 앞세우고 나비 날갯짓으로 가늘고 가벼운 몸 흔들며 걸어갔을까.

미흡하고 서운하게 느껴질 만큼 주갑은 소설에서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는 갔으나 작가는 주갑의 퇴장에 대한 상당한 설명을 끝끝내 생략한다. 

자기가 다 해놓고 하지 않은 척,

 가는 길 다 보고도 아예 못 본 척, 

사랑하고도 아니 한 척, 알고도 모른 척 시치미를 딱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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