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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공감

정읍 장날 - 고광헌

레니에 2018. 9. 4. 10:59


정읍 장날 / 고광헌



아버지, 읍내 나오시면 하굣길 늦은 오후 덕순루 데려가 

당신은 보통, 아들은 곱빼기 짜장면 함께 먹습니다

짜장면 먹은 뒤 나란히 오후 6시 7분 출발하는 전북여객 

시외버스 타고 집에 옵니다


배부른 중학생, 고개 쑥 빼고 검은 학생모자 꾹 눌러써봅니다


어머니, 읍내 나오시면 시장통 국숫집 데려가 나는 먹었다며 

아들 국수 곱빼기 시켜줍니다 국수 먹은 뒤 어머니, 

아들에게 전북여객 타고 가라며 정거장으로 밀어냅니다 

당신은 걸어가겠답니다


심술난 중학생, 돌멩이 툭툭 차며 어머니 뒤따라 집에 옵니다



고광헌 시집 『시간은 무겁다』중 <정읍 장날> 전문







돌멩이도 거뜬히 소화할 나이여서 였을까.

아니면, 자식의 삶이 당신들 삶보다는 훨씬 푸짐한 곱빼기가 되기를 바랐을까.

메뉴가 다르듯 사랑하는 방식은 달라도 부모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불평등하게 자식에게만 곱빼기를 시켜준다.


'여관'이란 글자가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이젠 '00여객'이란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와 시인이 걸은 비포장 길도 번듯하고 매끈한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장날의 표정도 많이 늙었다.


가난에서 비켜서고자 '정읍'보다 못한 촌에서 '광주'로,

그곳에서 다시 서울로 그렇게 다들 대처(大處)로 떠났다.


삶 안팎에서 옛것을 몰아내며 소박한 시절을 비웃었다.

그러는 사이 옛날은 나날이 주눅이 들어갔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버스를 기다리거나 운행 시간에 맞추지 않아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가용을 타고 더 빠르고 더 멀리 갈 수 있게 되었다.

세상 매뉴얼을 숙지하고 생에 기민하게 대처하며 짜장면이나 국수보다는 왠지 더 폼나는 파스타로 갈아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내의 마음에서 빡빡 깎은 중학생 머리 같은 공허가 쭈뼛쭈뼛 고개를 내민다.

시인도 아마 짜장면과 국수를 사주던 그 시절의 허름한 부모만큼 나이가 들었거나,

그는 이제 짜장면이나 국수만큼 즉각적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메뉴를 좀체 맛보기 힘든가 보다.


돈 안 되는 시를 쓰는 걸 도중에라도 그만두었더라면 시인들 살기가 훨씬 편했을 테고,

자식에게 삶 대부분을 헌신하지 않았던들 당신들 생이 그토록 고단할 리는 없었다.


부모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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