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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나를 세운 당신의 '붕괴', 그 이유 하나에 만족하며 <헤어질 결심> 본문

합의된 공감

나를 세운 당신의 '붕괴', 그 이유 하나에 만족하며 <헤어질 결심>

레니에 2022. 12. 28. 10:14

박찬욱 감독에 대한 나의 선입견과 "헤어질 결심"을 하였다.

그의 기존 작품은 김기덕 영화만큼이나 내겐 정서적으로 큰 충격이어서
그동안 부러 외면하였는데,
"헤어질 결심"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 머릿속에서 기꺼이 재생하는 수작이었다.

영화 포스터가 마치 색맹 색약 판별에 사용하는 색각검사 색판 같다.
유사 색점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숫자를 발견하는 그 색판을 내밀며,
"자, 이 사랑의 정상 여부와 영화의 미세한 차이를 판별해 보아요!"라고 미소 짓는 것 같다.





'서래'의 집 푸른 벽지는 파도 형태를 띠면서도 산의 능선처럼 보인다.
이 사랑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 너무나 선명하거나 미묘한 미스터리일 것이다.


 

자기 너머에 있는 의심스러운 존재를 알아맞히는 게임이 시작된다.
사건과 감정은 바로 말하지 아니하는 수수께끼처럼 그 내막을 쉽게 알 수 없다.

화면은 수수께끼를 풀듯이 두 사람을 빙 둘러 우회하며 겹쳐놓는다.


 

두 인물이 "단일한" 공간에서 서래의 집 벽지 무늬처럼 중첩되었다.

형사는 반드시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용의자로 지목한 대상을 자세히 알려하고,
사람도 예기치 않은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상대의 속내를 궁금해하며 관심을 보인다.

 

수사와 사랑의 속성은 그렇게 닮았는데,
형사와 용의자로서의 공적 관계이면서 서로에게 빠져드는 사적 관계인
두 개의 자아가 한 화면에서 점점 가까워진다.


 

사찰에서의 사찰(四察)로 묘사한 듯한 장면도 수려하다.
사랑에 빠진 양자는 눈, 귀, 마음, 입 네 가지로 상대를 살핀다.

가만히 있어도 북처럼 울리며 흔들리거나,
상대의 몇 마디 말과 글이 화려한 색처럼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경험을 한다.



해준이 회식 후 홀로 남겨진 장면도 인상적이다.

엔딩 장소를 그린 듯한 그림이 결말을 암시하듯 벽에 걸렸다.

 

산인 듯, 그러나 산 아닌 곳에 서래가 산을 만든다.

 

종착지에 다다른 '서래'의 시점숏.
그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마지막 장면인 셈이다.

산처럼 보이는 바다에서
'서래'는 자신을 무너뜨린다.
폭력에 무너진 그녀가 해준의 붕괴로 꼿꼿하게 세워졌듯이,
서래는 해준을 세우려 자신을 무너뜨린다.

자신을 다시 세운 그의 "붕괴", 그 이유 하나에 만족하며.



해준은 산처럼 세워질까.
아니면 등뒤로 보이는 섬처럼 고해(苦海)에 남겨질까.

 

 

산 같은 바다에서 해준이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헤맨다.
사랑은 어느 날 안개처럼 밀려와 상대의 단점과 결점,
나의 시야를 가리다가 온데간데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 "안개".

다만 이번에는 그녀만의 독창이 아니라 정훈희 송창식,

그 여자와 그 남자가 함께 부르는 듀엣 버전이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엔딩이다.



적록색맹은 이 색판에서 숫자 "73"을 본다고 한다

 

정상인은 읽을 수 없으나 색각 이상자는 더 잘 구분한다는 색판이다.

결함이 있는 사람만이
결함 없는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산의 색이면서도 바다의 색인 청색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녀의 드레스처럼
흐릿하고 불분명한 미제 사건으로
자신을 봉인하며 서래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사랑이라면 이제 지겹고 피곤하다는 사람들 흔한 세상에서 사랑이 뚜렷해지게.

정상인의 눈에는 안 보이는 그 사랑이, 비로소 정확해지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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