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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 코로나 덕분에 12월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각자의 피치 못할 사정에도 시간만큼은 흐지부지 흘렀다. 며칠 전 새벽에는 눈이 왔고, 나는 어둠 속에서 커피머신으로 한때의 잔상을 녹여 사진이나 글로 추출하듯 에스프레소 두 번, 룽고를 한 번 내려 마시며 새벽 특유의 정감에 덜미를 잡힌 채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두 번 들었다. 2. 한 번은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음반이었고 두 번째는 로저 노링턴의 지휘에 귀를 기울이며 어스레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악 문외한인 나는 지휘자의 자리바꿈에 따른 음악의 인상 변화를 확연하게 느꼈다. 유명 지휘자들의 해석보다 템포가 빠른 그들의 지휘가 빚은 소리는 귀를 거쳐 가슴속까지 흘러들었다. 그 소리는 맹렬한 기세로 대양을 헤엄치는 참치처럼 질주하였고, 어느 마..
부산서 출발한 KTX가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이 올라 타자 열차 안 분위기가 금세 달라진다. 디테일을 가차 없이 뭉개거나 생략한 트럼프의 단문 같은 짤막한 언어가 동대구역에 도착하기 전과는 전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도통 눈치도 없이 자기 할 말은 다하고 보는 그들은 말을 툭툭 내던지는데, 그들의 말과 행동은 걸리거나 막힘이 없지만 승객들은 파김치처럼 톡 쏘는 자극성이 강한 억양에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자리를 잡은 그들은 저렴한 섬네일과 언어를 마구 쏟아내는 정치 유튜브를 이어폰도 없이 보더니 여러 사람 들으라는 듯 단호하게 내뱉는다. "문재인 그 개**는 감옥에 가야 돼!" 어느 편에 선 사람들의 편협한 주관성과 옹졸한 일관성이 벌이는 처연한 소동에서 나는 내가 사는 세..
1. 유럽에 가면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우뚝 솟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저만 잘났다고 툭 튀어나온 것도 같은 성당 첨탑을 흔하게 보았다. 크로아티아의 '로빈(RovinJ)' 같은 경우도 그러한데 시간이 차곡차곡 축적된 듯한 풍경은 여행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2. 서울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한남대교를 강북 방면으로 걸어 건너다보면 왼편으로 한남 뉴타운 3구역이 보인다. 여기가 과연 서울인가 싶은 그 동네는 불특정 다수의 가난이 봄 산 진달래처럼 혼전만전 피어났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 없는 가난이 모여 살고 교회와 이슬람 사원이 마을을 이뤘는데, 최근 재개발 시공사가 선정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다. 3. 골목길은 갈피 없고 사방 경사가 가파르다. 저리 헐거운 건물..
#1 카메라 둘러메고 재개발 예정 구역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낡은 다세대주택 외부 계단을 오르는 택배기사가 보인다. 자기 등짝보다 더 큰 짐을 지고 2층을 지나 3층으로 오르던 그가 갑자기 주저앉더니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일어나지 않는다. 몇 분이 흐른 뒤 그는 무슨 결심이라도 선 양 1층으로 내려간다. 짐 두 개 그곳에 더 있다. 그는 심한 교통 체증에 걸린 차량처럼 느리게 느리게 나머지 짐을 마저 옮긴다. 그 풍경을 흐지부지 지켜보는 나는 점심을 커피 한 잔으로 건너뛰었는데도 뭐에 체한 듯 속이 답답하다. 아무래도 아무나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쯤 건네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2 전날 주문한 통영 굴이 도착해서 굴국을 보글보글 끓였다. 갓김치 담글 때 짠맛 순화용으로 넣어둔 무 조각을 꺼내 물에 헹구..
고창 선운사에 다녀갑니다. 꽃무릇 미치도록 핀 여기 선운사, 정면 아홉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큰 누각 만세루에 앉아서 보는 대웅전과 백일홍이 끝내주지요. 감탄은 속으로만 했습니다.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이니 입은 다물고요.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치아바타를 더 맛있게 만들어 먹을까만 궁리합니다. 만세루의 서까래와 대들보, 기둥, 툇마루는 삐뚤빼뚤합니다. 목수가 수없이 만지작거렸을 하나같이 못생긴 부재들이 세상의 부자연스러운 하중을 지탱하고 무지근한 허무를 버텨냅니다.
봄을 핑계 삼아 엄마 집에 들렀다 돌아서는데, 혼자인 엄마와 엄마 집 마당서 홀로 사는 홍매화 향기가 멀리까지 따라왔다.
1. [후추] 후추는 검은 황금으로 불렸다. 향신료 후추는 천 년이 넘도록 동서양에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쌌다. 조선시대에도 후추는 대단히 귀했다. 선조 20년, 일본서 도요토미가 조선을 염탐하러 보낸 사신이 왔다. 당시 조정은 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일본 사신 다치바나가 일부러 후추를 꺼내 술좌석에 뿌려대자 벼슬아치와 기생, 악공들이 앞다퉈 후추를 줍느라 연회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를 참칭하는 정치 모리배와 언론, 벼슬아치들이 일본이 고의로 슬쩍 매운맛을 흘리기 바쁘게 엎드려 기어다닌다. 2. [중경삼림] 영화 에서 왜 그리하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데 그녀 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난 너무 소심하게 변해버렸다. 레인코트를 입을 땐 늘 선글라스를 쓴다. 언제 비가 올지 언..
1. [부산] KTX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출발한 지 채 3분이 되기 무섭게 기사는 "이 정권 당장 탄핵해야지 원!" 하며 부산스레 맞장구를 원했다. "기사님, 조용히 갑시다. 저 민주당 권리당원이에요." 그 후 그와 내 입에선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요즘 내 몸속 깊은 곳에는 세상의 막막함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견적이 빤한 상대와 입을 열어 무엇 할 것인가. 설령 서로의 입과 귀로 수많은 말이 들락거려도 우리는 영영 논리와 사실로 서로를 설득할 수 없고, 끝내는 그들 못지않은 소리가 내 입에서도 나올 텐데. 2. [변검] 윤석열 검찰은 왜 이 중차대한 시국에 신천지를 압박하지 않을까? 시민단체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지자체장이 수사를 촉구하는 데도 그들은 태연하다. 무지막지하게 표창장에 집..

알 만큼 알고 해볼 만큼 해본 나이 중년. 그래도 뜻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 변수로 인해 인생이 좋은 쪽이나 나쁜 쪽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최악이다 싶은 순간조차 행운은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루이 암스트롱처럼 끝장나게 노래한다.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파리, 이탈리아 하면 왠지 기분이 들뜬다. 막상 가면 별의별 일이 다 생겨 역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지만 그래도 파리라는 고유명사를 떠올리며 우울할 보통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우아한 여인이나 매사에 섬세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남자가 동행한다면, 매일 드나드는 집처럼 뻔한 행복을 탈출하고픈 욕망이 생긴다. 영화는 정형화된 트로트 멜로디처럼 빤한다. 하지만 나는 중년의 ..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

애플 디자인을 총괄한 조너선 아이브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었다. 애플이 출시한 아이팟은 브라운 휴대용 라디오처럼 군더더기를 제거한 미니멀한 디자인이었다. 입이 저절로 벌어질 만큼 혁신이 돋보였고 유용했다. 쉽게 싫증 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폰에 내장된 계산기 앱 디자인처럼 디터 람스에 대한 오마주였다. 걸출한 장인의 디자인은 복잡한 요소와 구조를 과감하게 덜어내는 자기 철학을 지키면서, 조잡함은 단호히 거부하는 고집 또한 꺾지 않으나, 언제나 실용적이다. 오래 곁에 두어도 세련된 맛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크다. 낡아도 쓸만하다. 대단한 솜씨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며 칼럼을 쓴 임미리 교수와 게재한 경향신문 등을 민주당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 칼럼은 한 개인의 편협성과 언론사의 정파성이 맞아떨어져 나온 결과물이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안철수 씨 정치 세력화에 참여한 이력을 가진 그녀가 SNS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과는 다르게 언론 게재 칼럼은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름을 응원하진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자. 공직선거법 위반이 분명하고, 자신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지나치게 확신한 그런 글에 비위가 뒤틀리더라도, 그것까지도 민주주의다. 그것 없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름지기 그런 기묘한 주관을 대범하게 인정하는 상식과 교양이, 가짜와 무도한 선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킨다. 칼럼..

CJ 이미경 부회장의 수상 소감에 대해 말이 많네. 언젠가 봉 감독이 말했어. 결혼하고 생활이 곤란할 때는 대학 동기가 쌀을 가져다줘서 살았대. 한때는 너무 힘들어서 자살까지 생각했다더군. 그런 그를 누가 구했을까, 예술? 아니 그에게 투자한 투자가와 자본이었일 거야. 재능만으론 안 돼. 예술가가 밥벌이에 매달리지 않아야 더 좋은 작품이 나와. 먹고 살 길이 보이지 않아서, 오로지 먹고사는 데에만 함몰되면 사람도, 상상력도, 작품의 풍요성도 위축돼. 고흐나 이중섭은 가난해도 예술혼을 꽃피웠지 않냐고? 그래서 그들은 일찍 죽었지. 가난해서. 예술이 자본을 이끄는 게 아니라 자본이 예술을 견인해. 돈이 봉 감독에게 창작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예술성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듯, 잉여 자본이 문화를 만드는 거야. 스..
숙명여대 사건은 페미니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나 차별받았어요!" "나 힘들었다고요!" "상처받은 내 맘 좀 알아달라고요!" 등의 정서를 육화하며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 용기 있게 자신을 드러낸 사람들 덕분에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치부가 드러났다. 반면 페미니즘 담론이 폭증하면서 정체 모를 분노가 페미니즘의 외피를 입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예리한 흉기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일부 극단 페미니스트들의 미러링이 확산하더니 이젠 모두를 향해 나도 힘들었으니 너도 차별받으라며 혐오한다. 여성만이 가장 큰 피해자이고 약자라고 전제한, 자기 설움에 과잉 몰입한 이들이 전혀 정량화할 수 없는 그 감정만으로 판단을 내려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러는지 ..
한 줄로 압축한 제목은 <결혼 이야기>인데 실은 이혼 이야기다. 결혼의 진척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조금씩 실망하는 과정이거나 이혼까지를 포괄하기 때문인 듯하다. 대신 우울하지 않다. 극 중 '애덤 드라이버'는 직업이 연출가이고 '스칼렛 요한슨'은 배우다. 남편은 부인에게 자기..
이 영화 좋다. 실제 인물과 매우 흡사한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의 연기는 두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은 상반된 성격을 가졌다. 각자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고집스러운 원칙이 있어서 상대를 향해 쓴소리하거나 눈살을 찌푸린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원인을 캐묻고 답을 요..
소설 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 첫 문장 바로 앞서 작가는 '하는 말', 즉 서문을 썼다.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 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눈을 부릅뜨고 객기를 부리는 글이 있다. 선 굵고 점잖은 어휘를 골라 쓰지만 음흉한 속내가 빤히 비치는 글도 숱하다. 그..
진중권 씨가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는다면서도 최근 자신의 행위는 '부패한 친문 측근들' 때문이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이번에도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부패한 집단권력에 맞서는 비범한 개인, 즉 투사로 셀프 격상하는 목적에 충실했다. 못된 인간들이 그런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런다고. 사랑해서 때린다고." 윤석열 총장도 언제는 자기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더니 대통령에 대한 충정은 변함없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 말은 복잡해도 본질은 단순하다. 다 행위와 결과로 드러난다. 진중권 씨는 자신이 오랜동안 "국이"라고 부르던 친구 가족에게 행하는 폭력을 정의와 결기로 포장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자신만을 향하고, 자기 존재 증명 강박에 갇히는 일인칭 언어는 타인을 가..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
세상 일은 척 보면 다 안다는 듯 떠드는 진중권 씨는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그는 종편 패널과 보수 언론서 현 정부 공격용으로 활용되지만, 사실 진중권 씨는 그 자신이 몹시 무시하는 김어준 같은 영향력이 1도 없다. 그가 경쟁심을 느낄 유시민 작가처럼 베스트셀러를 연달아 써내지도 못한다. 조국 교수처럼 언제든 돌아갈 명문대 정교수 자리도 없다. 그렇다고 힘들 때 잘 뭉치는 '문빠'같은 지지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나의 주관적인 가정은 아무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그의 주장처럼 미천하기 짝이 없다. 김어준 씨는 주류가 주도권을 거머쥔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 힘으로 새로운 언론 유형을 만들었다. 그는 전통언론의 비아냥 속에서 청취율 1위 프로그램을 일구며 현실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