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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첫문장의 첫인상이 강렬하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과학과 문학과 철학을 적절히 아우르는 낭창낭창한 글을 썼다. 일테면 절친과 술한잔 하면서 우리 현실이 얼마나 엉뚱한지를 신나게 떠..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박경리 작가가 1973년 6월 3일 밤에 쓴 서문 중 마지막 문단이다. 2001년 작가는 2002년 판 서문을 아래 문단으로 시작한다.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 과거라는 드넓은 허무와 미래라는 막연한 적막이 만연한 허허벌판에 홀로 우뚝 선 태양이 하릴없이 열을 ..
엄마는 추석 전날 도착하셨다. 자식은 비로소 노인이 된 엄마가 쓸 화장품을 사고, 잠옷을 샀다. 가을옷도 샀다. 스카프도 샀는데, 하나로는 영 아쉬워 하나 더 사자고 실랑이하다 그만 집으로 왔다. 엄마가 잠시 단잠에 빠지자 자식은 몰래 나가 옷 몇 개를 또 샀다. 추석날 하늘은 깨끗했다. 피곤한 엄마는 거실 바닥에서 낮잠을 주무셨다. 모로 누운 엄마의 등은 심심하고 허전했다. 다 큰 자식은 다스운 봄날 스르르 몸이 녹아 눈치코치 없이 널브러진 강아지처럼 엄마 옆에 누워 구시렁댔다. "울엄마 많이 늙으셨네." 조금 전 엄마가 떠나셨다. 운 좋게 싹이 튼 어린 것들과 뿌리를 내린 젊은 것들은 영악하게 영글고 온갖 풍상을 견딘 것들은 정직하게 시들다 맥없이 사라지려니 싶다. 나도 이제는 여행 그만 다니고 가끔..
1. 언론의 독창성은 개인의 정체성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논리와 감성을 조합한 앵커브리핑과 사안별 심층 보도는 뉴스룸만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형식이지요. 속보 경쟁보다는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품위를 유지하는 보도 방식은 손 앵커가 그동안 견지한 바탕이자, 시청자로부터 얻은 신뢰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2. 이번 앵커브리핑의 맥락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진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엇보다 '균형'이 필요하겠지요. 설령 진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다들 각자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해 오독하고 가공할 겁니다. 그래요, 중요한 건 누군가는 장마 이후를 말해야 합니다. 해마다 오는 장마가 좀 지루했다 한들 그게 뭐 대숩니까. 3. 그동안 손 앵커님은 언론의 능력, 그러니까 '힘'을 여러 차례 입증했습니..
나의 일상은 마음에 쏙 드는 새로운 음식이 연이어 나오는 풀 코스 정식이 아니다. 뱅글뱅글 맴도는 일의 반복이다. 패터슨이 모는 버스는 딱 행복한 지점만을 골라 항구적으로 안착하거나 지름길을 택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어제 만난 승객이 오늘 다시 그가 운전하는 버스에 오른다. 다들 몇 개쯤은 보듬고 살 고민도 덩달아 마음에 올라탄다. 패터슨은 그것들을 죄다 끌어안고 버스를 몰며, 창밖 풍경이 변하듯 어제와는 어딘가 다를 나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 영화는 판에 박은 듯한 자극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유혹하지 않았다. 카메라는 패터슨의 엇비슷한 매일을 게으름뱅이처럼 관찰한다. 기승전결 없는 그 서사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싱거운 현실 안에도 어쩌면 인생 전부와 맞바꿀만한 의미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이것은 소소한 이야기다. 히어로나 판타지가 부재한 서사로 일정 수준의 관심을 끌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임에도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다. 그리고 우아하다. '리듬(rhythm)'은 '흐른다' '움직인다'는 뜻의 동사 'rhein'을 어원으로 하는 그리스어 'rhythmos'에서 유래했다 오프닝 시퀀스에 왈츠를 추듯 화면을 우아하게 가로지르는 지게차가 등장한다. 그때 흐르는 배경음악은 요한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그 리듬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출근, 근무, 퇴근 등 모든 것이 기표가 된 세상에서 블루칼라 계층이 좀체 맛보기 힘든 형식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건물은 사람이 쇼핑에만 전념하도록 애초에 창문을 설계하지 않는다. 그곳의 제품과 드나드는 인원은 다양한데 의외로 본질은 단순하다. 사실 대형마트..
에드바르 뭉크 , 1984-1985, 115×152㎝, Oil on canvas. 그녀가 취했다. 지친 마음을 술 몇 잔에 헹궜을까. 남에게는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술 마신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숙취가 찾아온다. 그 고통은 과음과 정비례한다. 함부로 분위기에 취해, 감히 삶과 사랑과 사람 따위를 사랑하며 자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취기와 숙취 또한 깊다. 오슬로 국립박물관장이 이 그림을 구매할 당시에 박물관 후원자 중 한 사람이 따졌다. "오슬로 국립박물관은 술 취한 여자가 쉴 곳이 아니다." 그러자 박물관장은 기자 회견을 열어 그림처럼 호소력 있는 언어로 반박했다. "이곳이 쉴만한 곳인지 아닌지는 그녀가 깨어나면 물어보겠다. 그러나 지금은 자게 내..
감천동 / 문인수 부산 감천항을 내려다보는 산비탈, 감천동 문화마을 골목길들은 참, 온통 애 터지게 좁아요. 그중에서도 거리 병목 같은 데 한토막은 어부바, 어느 한쪽 벽에다 등을 대고 어느 한쪽 벽엔 가슴을 붙여 또 하루 비집고 들고 나야 그러니까, 게걸음질을 쳐야 어디로든 똑바로 향할 수가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큰길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두사람. 몸뻬 차림의 뚱뚱한 여자가 부스스한 머리, 키가 껑충한 사내더러 이죽거리며 잔뜩 눈 흘려요. "술 좀 대강 처먹지!" "왜, 내가 또 잠 못 들게 했나?" 게 골목, 그 통로를 경계로 둔 건너편 집과 건너편 집. 밤중, 사내의 헛소리며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친 여자. 여자의 지청구와 사내의 대꾸가 정류장에 나온 이웃 사람들 모두 낄낄낄 웃게 하지만 오랜 ..
가을 아욱국 / 김윤이 방고래 딛고 어머니가 들여온 밥상 아욱국이 입안에서 달금하다 날마다 재봉틀 앞 허리 굽혀 앉은뱅이하다 가끔씩 펴고 일어나 가꾼 것들이다 동네 아낙들의 시샘 속에도 오가리가 들지 않고 푸릇하니 살이 올랐다 빈 북실에 실을 감듯, 두엄으로 길러낸 아욱잎엔 ..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 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문태준 시집 『맨발』중 전문 하나둘 싹을 내밀던 보리가 제 모습을 얼추 갖추며 나날이 여문다. 청보리밭 살펴 가는 바람은 아마 마파람일 것이다. 그때의 곡식은 그 바람에 든 습기를 먹고 큰다. 같이 사는 짐승도 식구다. 비가 온다고 사람이 그들을 챙긴다. 사람의 고민은 한쪽으로만 치우친다. 성치않은 제 몸이 먼저 심란할 사람이 비스듬하게 지나간다. 농사는 돌보기의 시작인데, 그가 거름을 챙겨 땅을 돌보아준..
화학반응 / 박철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박철 시집 『없는 영혼에도 끝은 있으니』중 전문 언어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을까. 이를 달리 말하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천 냥으로도 갚을까 말까 한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토씨 하나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한마디 말은 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며 세상을 달라지게 할만큼 힘이 세다. 사람은 언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비가 오는 날과 볕이 많은 날은 기분부터가 다르다. 아침과 저녁때의..
정읍 장날 / 고광헌 아버지, 읍내 나오시면 하굣길 늦은 오후 덕순루 데려가 당신은 보통, 아들은 곱빼기 짜장면 함께 먹습니다 짜장면 먹은 뒤 나란히 오후 6시 7분 출발하는 전북여객 시외버스 타고 집에 옵니다 배부른 중학생, 고개 쑥 빼고 검은 학생모자 꾹 눌러써봅니다 어머니, 읍내..
만금이 절창이다 / 문인수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은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정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문인수 시집 『배꼽』중 전문 ..
바퀴 / 문인수 말복날 수륜리(水輪里) 유원지엘 갔다. 우리는 계곡물 콸콸거리는 어느 식당 숲 그늘에 자릴 잡았다. 물가 여기저기 네모난 살평상을 박아놓고, 그러니까 급류의 속도를 최대한 붙잡아놓은 집이다. 하지만 유수 같은 세월, 희끗희끗 달아나는 물살이다. 옆자리 살평상엔 중늙은이 아주머니 넷이 먼저 와 앉아 있다. 닭백숙에 소주도 두어 병 곁들여 조용히 복달임하는 중.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세월이라는 것이 흐를까, 계곡물 소리는 여기저기 커다랗게 엎딘 바위들도 연속, 험하게 잡아채 제 속도에 매단다. 그래도 그 소리 듣지 않으면 가지 않을 세월, 아주머니들은 음식상을 치우게 하고 각기 웅크리고 눕는다. 머리꼭대기에 발바닥, 머리꼭대기에 발바닥…… 친한 사이끼리 일생일대를 잇대며, 그러나 모..
예전에 이산가족 상봉 관련 방송과 사진을 보면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방송과 기사가 감동을 강요하며 호들갑을 떨어도 나는 당사가가 아니어서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어요. 이산가족 상봉을 다루는 매체는 항상 남측이 북측에 훨씬 좋은 선물을 하는 뉘앙스로 끝을 맺었습니다. 북..
1. 이번 여름은 누구에게나 아마 처음일 것이다. 폭염경보는 일 최고기온이 35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하면 발효되는데 요새 하도 놀라서인지 이젠 35도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어젯밤엔 기계 도움 없이 잠을 잤다. 초저녁부터 점점 내려가기 시작한 기온은 자정쯤엔 가을날씨 같은 23도였다. 습도도 50%로 적정했다. 대기 질도 좋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상큼한 바람이 확 밀고 들어왔다. 애면글면 기다리던 가을 같아 반가웠다. 기분 좋은 심호흡을 하며 사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 싶어 온몸 세포를 다 동원하다가 한편으론 좀전의 그 열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신기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지는 인간사의 덧없음 마냥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은 매일매일 변한다. 날씨가 선선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를 ..
역모 / 전병석 내일이면 엄마는 퇴원한다 형제들이 모였다 엄마를 누가 모실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큰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양원에 모시자 밀랍처럼 마음들이 녹는다 그렇게 모의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던 작은 형수 전화가 숨 넘어간다 어머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며...... 퇴원 후를 걱정하던 바로 그 밤 자식들 역모를 눈치챘을까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셨다 전병석 시집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중 전문 시인은 어렵게 말하지 않는데 너무 빤한 우리 속내가 무참히 드러난다. 내 부끄러움도 시 속에서 또렷하다. 진실은 이렇듯 쉽게 표현될 수 있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자식들은 이미 구차한 변명을 여럿 마련해 놓았다. 우리는 우리가 낳은 자식 없이는 살 수 없어도 늙고 병든..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콩국물을 샀다. 집에 돌아와 물을 끓이고 국수를 삶았다. 냉장고를 열어 오이를 꺼내 채썰고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잘랐다. 길어온 콩국물을 붓고 새싹채소를 약간 곁들여 고명으로 얹었다. 내리 며칠 콩국수를 먹었다. "이열치열이지!" 유명 삼계탕집과 고깃집에는 사람들이 늘어섰다. 철들며 수없이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