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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지금 조박사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그게 없었다.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다. 정서로 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했다. 나는 그와 그럴듯한 겉멋을 부려본 데 지나지 않았나보다.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였다." 1. 삶에는 마치 축 늘어난 뱃살이나 툭 불거지는 옆구리 살처럼 비공개로 닫아두는 부분이 있다. 남에게 들킬세라 쉬쉬하며 겉옷과 보정 속옷으로 단점과 허물을 깜쪽같이 감추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군살과 튼 살들. 그런데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 속살이 어쩌면 인간의, 인간적인 몸이라고 여겨진다. 2. 잘 차려입은 모습과 화장한 표정에 지나치게 익숙한 어느 날 실재의 모습을 대하면 굉장히 낯설다. 다 벗은 ..
통장 갯수가 늘고, 집 평수가 넓어지고, 차 배기량이 커졌다. 근데 삶이 이래도 되는 건지 자꾸 의문이 든다.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사는 집, 누구나 쓰는 제품들, 다들 타는 차, 다들 하는 유희. 대동소이하게 평준화된 삶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훗날의 후회가 예감돼 어딘가 불안하다. '..
헤어짐에 좀 더 너그러워지자. 쓸모없으면 눈치껏 사라지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자고, 문상을 가서 조용히 앉았다 왔다.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올고 비는 내리고 홀로..
를 읽었다. 도중에 쉬면 완독 하지 못할 거 같아서 매일 계속 읽었더니 3개월이 걸렸다. 여행이 그렇듯 독서도 고강도의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노동이다. 온몸이 하는 그 일에는 불편과 낯섦, 즐거움 등이 골고루 섞여 있다. 독서는 타인의 문법과 사유를 문자로 만나는 경험이어서 나름의 고충이 있다. 도 방언과 작가 고유의 표현 방식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경상도 방언 대화체가 많은 는 요즘 글이 아니고 내가 살던 시대가 아니어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는 상당한 인내를 요구했다. 사실 그동안 마음의 빚이었다. 유명 외국 소설을 읽을 때마다, 토지가 언급될 때마다 갈등했는데 무엇보다 토지를 읽지 않은 이유는 분량 때문이었다. 스무 권은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지금 이 포스트처럼..
희열과 고통스러움, 절정이 지나가고 어둠과 정적이 에워싼다. 용이는 여자 가슴 위에 머리를 얹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는 신위도 제물도 없고 월선네의 힘찬 무가(巫歌)도 없고 용이 모친과 강청댁의 얼굴도 없었다. 마을도 없었다. 마을도 없고 삼거리의 주막도 없었다. 논가..
혜관은 못 들은 척 강 언덕에서 강을 바라보며 목탁을 치고 독경을 하고 있었다. "울퉁불퉁 돌대가리 중이 그래도 불경 욀 줄은 아는디." 주갑은 중얼거리다가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리고 조끼 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어 붙여물고 피어오르는 연기 속의 강 건너편 나무 한그루를 바라..
"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솔직하게 말입니다. 저는요, 송관수 김길상 그분들을 우러러 받들 만큼 어리지도 않고 자신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도 꾸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애..
서희는 흐느껴 울었다.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으나 흐르는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가 앉은 별당, 어머니 별당아씨가 거처하던 곳, 비로소 서희는 어머니와 구천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어머니는 불행한 여인이었던가, 나는 행복한 여인인가 서희는 자문한다. 어쨌거나 별당아씨는 사랑을 성취했다. 불행했지만 사랑을 성취했다. 구천이도, 자신에게는 배다른 숙부였지만 벼랑 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다가 간 사람, 서희는 또다시 흐느껴 운다. 일생 동안 거의 흘리지 않았던 눈물의 둑이 터진 것처럼. 박효영의 자살 소식을 들은 서희는 연신 눈물을 흘린다. 서희도 박 의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희는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좋아도 좋은 티를 내지 않았고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귀녀의 생애가 끝나는 날 강포수의 생애도 끝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죽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 강포수는 귀녀와 더불어 있다. 옥중과 옥 밖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엄연한 법의 거리요 지척이면서 가장 먼 그들, 서로가 서로를 보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나 강포수는 일찍이 귀녀가 이같이 자신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 가랑잎 더미 위에 쓰러뜨렸을 적에도 귀녀는 강포수에게 멀고 먼 존재였었다. 강포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주받은 악녀이건 축복받은 선녀이건 그것도 강포수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다만 거기 그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 여자를 위해 서러워해..
"부처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 하였고 예수는 사랑이라 하였고 공자는 인(仁)이라 했느니라. 세 가지 중에는 대자대비가 으뜸이라. 큰 슬픔 없이 사랑도 인도 자비도 있을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대자대비라 하였는고. 공(空)이요 무(無)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빈 자이니 쉬어갈 고개가 대자요 사랑이요 인이라. 쉬어갈 고개도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그 만남의 일순이 영원일까. 강쇠야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그날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해저터널을 지나 발개라는 곳으로 간 이들은 조금 때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유별나게 물이 많이 빠져나간 갯벌,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갯벌에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조개를 파기 시작했다. <토지 16권. '5부 1권'. 252쪽. 마로니에북스> 조금 때 ----> 사리 ..
"맞는 놈 때리는 놈, 도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없어지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밥그릇 크기를 따져서 생긴 일입니까? 진주서 농청과 백정이 싸웠을 때도 이해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짓밟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의 본성." (…)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 본성, 본성 말입니다. 밥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위냐 너가 위냐, 그것 때문에 더 많이 때리고 맞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구요. 재물이나 권력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등이면 굶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다 많은 재물, 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는 것은 실상 배고픈 것하고 절실하게 관계되는 것..
송관수는 치열하게 살다 갔다. 신분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인간의 존엄을 외쳤다. 그는 형평사운동, 노동자파업, 독립운동에 관여하며 세상의 모멸로부터 그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 했다. 관수는 농민이었지만 백정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백정이란 굴레를 뒤집어썼다. 그 굴레가 대를 이어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자 깊은 좌절과 자기 비하에 빠진다. 하고많은 것중에 천대와 차별만을 자식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부모의 한이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송관수의 저항의식은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양반들이나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그는 왕의 편도, 민족의 편도 아니었다.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의 편에 서서 그는 강쇠와 함께 싸웠다. 관수는 가슴에 못박힌 장남 영광과의 재회를 앞두고 만주에서 콜레라로 죽는다. 한편..
"봄아 봄아, 우찌 그리 더디 오노. 고봉준령 넘니라고, 허리 아파 쉬니라고 더디 오나. 산 밑에는 명춘화 산수유도 피었일기고 까치는 안짱걸음 걸음시로 고개 넘어 손(客) 온다고 까까 거릴 긴데 첩첩산중 이골짝은 우찌 이리도 적막강산인고." (…) 춘매는 봄이 더디 온다고 푸념하곤 했었다. 그러던 춘매도 이른 어느 봄날, 꽃바람에 할미 죽는다는 말을 뇌면서 세상을 떴는데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어찌 됐든 차면 달 기울듯 올 것 오고 갈 것 간다. 으레 그런 줄 알면서도 봄을 기다린다. 님이든 독립이든, 저절로 즐거워지는 정말 그냥 봄이든 그러니까 봄에 투사하는 마음과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그 속도에 대한 감각도 상대적이다. 소설 에는 작가의 일본론을 비롯해서 귀 기울일 만한 사유..
"신비와 현실적인 두 관념을 수용한 것에 한(恨)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본 말로는 한을 원한으로 쓰고 그것은 복수라는 묘하게 엽기적인 분위기를 갖는데 우리가 말하는 한에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한이 된다, 한이 맺혔다, 할 때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빼앗겼든 당초 주어지지 않았든지 간에 결핍을 뜻하고, 한을 풀었다, 할 때는 채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해서 결핍은 존재할 수 없는 방향으로, 채워졌음은 존재하는 방향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생명 자체에 관한 거예요. 한은 생명과 더불어 왔다 할 수 있겠어요. 한의 근원은 생명에 있다 할 수도 있겠어요. 흔히 지옥이다 극락이다 하는 말을 쓰는데 하나는 공포의 상태, 하나는 안락의 상태, 그것은 정지된 상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극..
"지난날을 생각허믄 모두가 다 후회스러운 일뿐인디 그 후회스러운 날들이 그립단 말시." "이제는 나이도 들고 했는데 편키 살다 가야 안 하겄소." "주막 뜯어 개여라 그 말인디, 넘들도 그런 말 많이 허지라. 그러나 사람 못 보고 워찌 산디야? 오는 사람보고 가는 사람보고 날아가는 까마귀보고도 내 술 한잔 먹고 가라 하고 접은디, (...)" 먼 길 가다보면 피곤하다. 독서도 마찬가지.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책이 안 읽히는 날도 있다. 그런 날 영산댁의 말이 정답다. 여봐란듯이 어깨 펴고 걷지 못한 지지부진, 더딘 인생들 예외 없이 받아들였을 주막에 다 늙은 영산댁이 있다. 함께, 술 한잔 하고 싶다.
"애국, 애족만 내세우면 범죄도 해소되는 그 기만을 수긍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민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부정했을 뿐이야." (…) "애국심이나 국수주의는 출발에 있어선 아름답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해지면 질수록 추악해지고 비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빼앗긴 자나 잃은 자가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또 민족주의를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끼 들고 강탈한 자의 애국심, 민족주의는 일종의 호도 합리화에 불과하고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흔히들 국가와 국가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엔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 말은 국가나 민족을 업고서 저지르는 도둑질이나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하..
조용하하고 결혼을 생각한다. 얼레설레 아차! 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결혼. 그가 귀족이 아니었고 자산가가 아니었고 교욱받은 신사가 아니었고, 그랬다면 과연 결혼이 이루어졌을지 그것은 의문이다. 차디찬 분빛과 창백해 보이는 지적인 용모에 명희 마음이 조금은 끌렸던 것을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