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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셀리 호킨스의 연기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지켜보려 극장에 갔다. 오늘 개봉한 영화의 첫 회를 선택했다. 영화의 플롯은 전형적이다. 이질적인 것과의 사랑은 '킹콩'이나 '미녀와 야수' 같은 작품을 통해 꽤 익숙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남성성이 내재한 괴생명체와 그에게 연민하고 공감하는 아름다운 여성성이 등장해 폭력에 저항하고 치유의 역할을 하는 내러티브는 그동안 자주 변주되고 애용되었다. 문제는 설득력이다. 소재 선택이 촉발한 기시감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연출자의 역량이다. 영화는 마치 을 보는 듯 했다. 우아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와 원색에서 조금은 톤 다운된 색채로 생략된 대사를 오히려 풍부하게 표현한 화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다채롭고 세련된 기조를 시종 유지하는 것을 보는 것과 적절한 자리마다..
살면서 내가 내 주관적 잣대로 선정해 지독히 편애했던 어떤 옳음과 어떤 훌륭함과 어떤 멋짐에 그러했듯, 앞으로 나는 그녀가 글로 자아내는 정취를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사랑할 것 같다. 그녀의 첫 시집을 기다린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
대개 영화와의 만남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간혹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보는 영화가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드문 경우다. 어쩌다 들춰보기는 해도 같은 명작을 두 번은 읽지 못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래도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 깊게 각인되는 영화는 있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은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는 그런 영화다. 다른 인종, 다른 언어, 다른 음식, 다른 세계. 그 낯섦을 수용하는 장면이 따스했다. 는 옴니버스영화처럼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개별세대의 집합체인 아파트가 그렇하듯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한덩어리로 보인다. 극을 이끈 배우들도 같은 영화에 공존하지만 서로 만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는 덜컹거리거나 단절됨이 없다. 오히려 화면 곳곳에 유머를 펼치..
영화는 언뜻 보면 B급 패러디물 같다. 만화의 '데포르메'처럼 연출은 의도적으로 과장되었다. 그동안 많은 영화가 차용한 "어서와" "다녀왔어요" 의 결말로 매듭짓는 '타다이마 클리셰'는 선하게 살면 천국이나 윤회가 기다린다,는 종교적 형식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인간으로 ..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
완전 쒼남! 노래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발음과 속도와 선율이라 귀에 쏙 들어온다. 가족 형태가 다변화하는 시대에서 삼대를 아우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불투명해지는 먹이사슬 관계를 명랑하게 포괄하는 동요가 참 유쾌하다 무심코 동요 전반부에서는 신..
물 어머니학교 12 티브이 잘 나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놓으면 안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에다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겄다. 뭐가 그리 슬퍼..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 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이정록 시집 『정말』 중 전문. 한 몸이었다가 두 ..
기사 양반, 이걸 어쩐댜? 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 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그러니께 나부터 타는 겨. 나만 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그나저나, 의자를 몽땅 경로석으로 바꿔야겄슈. 영구차 끌듯이 고문고분하게 몰..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아하, 욕실 바닥을 치며 웃는다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마는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소리로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디, 어디 없을까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광천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어른이라서 부지런한 게 아녀 노심초새한테 새벽잠을 다 빼앗긴 거여" 두 번이나 읽은 조간신문 밀쳐놓고 베란다 창문을 연다 술빵처럼 부푼 수국의 흰 머리칼과 운동화 끈을..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운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정록 시집 『정말』 중 전문. 여자는 행복을 단념..
시 어머니학교10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
1. 의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응급 헬기 안은 아닐 것이다. 피와 변을 보고 만지는 수술실도 아님은 외과 기피 현상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군인에게 가장 안전한 곳도 적에게 노출되는 야전이 아님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2. 북에서 한 남자가 선을 넘어왔다. 상황에 따라 진보이거나 보수인 나는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데, 어떤 이가 넘고자 하는 선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선이었다. 일부 정치인들이 그를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때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그를 살리기 위해 군인들과 의료진의 앞뒤 가리지 않는 고투가 있었다. 3. 줄을 잘 서야 하는 건 한국사회의 금과옥조다. 주류 사회가 받아들일 경로를 밟지 않으면 인생이 순탄치 못하다. 거칠게 말하면 쪽수가 많은 쪽, 그..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을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중 전문. 더는 꽃게를 먹을 수 없었다. 시에 배인 외면하기 힘든 울음 때문이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불 끄고 이불 덮듯 보듬으며 잔인한 생과 불화하지 않는 모습에 입맛은 지워지고 하찮고 사소한 것들의 불행이 돋아났다. 우리 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항시, 숱한 것들의 낙담과 희생이 있었다. 갑이 을..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 전문. 더러 이 생에서 잘못을 자초한 사람 곁에, 잘못 없는 낙엽이, 잘못 놓이지 않은 글자가 나란히 시가 되어 앉았다.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목제 인형이 있다.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는 구조인데 하나를 열면 그 속에 크기가 더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다. 정교하게 제작된 제품은 마지막 인형의 크기가 핀셋으로 집어야 할 만큼 작다. 안철수 씨는 마트료시카 같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작아지는..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각색해 교묘히 서술자의 위치만을 높이는 시들이 많다. 그런 시는 식초처럼 시다. 어떤 시는 새로운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시다 못해 산도가 너무 높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다. 비판의식과 도덕 강박을 내세우는 경향..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보름째 같은 꿈을 꾸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반복되는 꿈 때문에 하룻밤에 몇 번씩 잠을 깼다. 그사이 체중은 5kg이나 줄었다. 그가 집안일 때문에 고향에 갔던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러 잘 먹지 못하는 술까지 마시고 잠들었지만, 여지없이 동일한 꿈을 꾸다 깨었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자다가 저절로 새어 나온 한숨 소리를 들은 그의 동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요즘 걔가 자꾸 꿈에 보인다." 그가 말한 여자는 그와 헤어진 지 십 년이 지난 옛 애인이었다. 두 사람은 십 대 후반에 만나 청춘을 다 쓰며 사랑한 사이였는데 남자의 동생과도 허물없이 지냈었다. 그가 최근의 일을 말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에 저도 봤어요. 어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