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구시렁 (14)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몸 활짝 펴고 봄바람 실컷 쐬는 한량 노릇 하려니 날이 몹시 차고 매섭다. 비거스렁이 하는 바람 샤워 덕에 미세먼지는 말끔히 씻겼는데, 잔뜩 심술 난 바람은 매화 머리끄덩이를 인정사정없이 움켜잡고 흔든다.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 당장 내 멱살이라도 붙들 기세, 내 옆에선 남보다 일찍 발랑 까진 목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와들와들 떤다.
1. [부산] KTX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출발한 지 채 3분이 되기 무섭게 기사는 "이 정권 당장 탄핵해야지 원!" 하며 부산스레 맞장구를 원했다. "기사님, 조용히 갑시다. 저 민주당 권리당원이에요." 그 후 그와 내 입에선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요즘 내 몸속 깊은 곳에는 세상의 막막함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견적이 빤한 상대와 입을 열어 무엇 할 것인가. 설령 서로의 입과 귀로 수많은 말이 들락거려도 우리는 영영 논리와 사실로 서로를 설득할 수 없고, 끝내는 그들 못지않은 소리가 내 입에서도 나올 텐데. 2. [변검] 윤석열 검찰은 왜 이 중차대한 시국에 신천지를 압박하지 않을까? 시민단체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지자체장이 수사를 촉구하는 데도 그들은 태연하다. 무지막지하게 표창장에 집..
오늘 하현달까지의 거리는 대략 363,297 킬로미터. 달 쪽으로, 달 쪽으로, 안 보는 척하면서 발꿈치를 들었다. 몇 센티가 가까워졌다.
김 서린 욕실 거울을 손으로 닦을 때 드러나는 내 얼굴을 향해 말한 적이 있다. "너도 이제 고3이다." "너도 이제 서른이다." "너도 이제 마흔이다." 내가 웃어야 웃고 내가 물어야 물으며 단 한 번도 아니라고 먼저 말하지 못하는 거울을 보며 어제도 한 생애를 지지부진한 남자가 거울 속 사내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호시절은 다 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백설 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의 거울처럼 결국 사람은 착각의 크기만큼만 행복하고 그 행복이란 타협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직은 괜찮다'라는 착각이 나를 추연히 안심시켰다.
#1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었다. "이제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편히 쉬는구나 죽으면. 아, 나도 좀 일찍 죽었더라면 편히 쉬고 있었을까. #2 좋은 영화는 노트북으로 봐도 좋고 IP TV로 봐도 좋으나, 일반 영화관에서 보면 좀 더 좋고 아이맥스나 4D로 보면 더더욱 좋다. 세계 최대 IMAX관이라는 CGV 용산은 부족한 게 별로 없다. 그곳에서 를 보면 다른 아이맥스 스크린의 두 배에 달하는 화면발과 음향이 몰입도를 확장하기에 약간은 좋다. 그런데 일반 영화관에서 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그 장점이 모두 사라진다. 하물며 다른 디바이스에서는. 세상은 일사불란하게 '피에타'를 명작으로 납득하지만 신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죽어간 예수에 비해 지나치게 젊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
오래된 것들을 버린다. 다 끌어안고는 살 수 없으니 현명한 선택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2년 된 스마트폰. 3년 된 옷과 애인. 5년 된 차와 가구. 7년 된 책. 10년 된 집. 그런 건 일도 아니라며, 80년 된 사람은 요양병원에.
#1 8월의 마지막 날 상현달 까지의 거리는 대략 405,010km. 여기서도 너무 선명한 달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너는 도대체 얼마나 먼 것이냐. #2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계획이든 부주의든, 알고서도 저질렀다면 참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거잖아. 그때는 부모라는 사람들도 철이 없어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모르고 낳았을 거야.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3 오후 한때 흐린 어느 날, 등을 둥글게 모은 초승달이 저녁 하늘을 발자국 투명하게 걸어갔다. 그 큰 하늘도 달 하나 살기엔 적당한 공간처럼 보였다. 가만 보니 내 달 옆에서 올바른 지점에 위치한 잘 닦인 별 몇 개도 반짝. #4 신호에 멈춰 서서 바라본 사방이 문득 애매했다. 무사고 운전으로 착실히 주행거리는 늘리는데 정작, 나..
지난 5월 25일에 벌어진 일이라 한다. 서울대공원에 있는 아기 코끼리(한 살)가 실수로 물에 빠졌다. 엄마(열세 살)는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근처에 있던 이모(서른여섯 살) 코끼리가 쏜살같이 달려와 엄마를 이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새끼를 구했다. 침착하게 상황을 해결한 ..
마음을 위한 일에는 항상 몸의 역할이 있다. 몸이 기댈 데도 마음밖에는 없다.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세상이라도 자신이 쓰러지는 걸 방치하는 자기란 없기에, 겪고 사는 일 다를 바 없는 모든 꽃 봄 되면 새 꽃 밀어 올리고, 사람은 마뜩잖은 몸뚱이 곧추 세운다. 이미 써먹은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