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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 를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동명 단편소설은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번에 다시 들춰봤다. 2.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들을 다독여 회복으로 이끄는 줄거리다. 좀 식상한 듯한 그 모티브를 다룬 영화의 러닝타임이 무려 179분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내가 모르던 배우인 "미우라 토코"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 그녀를 발견한 기쁨이 컸다. 3. 주인이 잘 관리한 빨간색 사브 900(원작에서는 노란색 사브 900 컨버터블)이 정속 주행한다. 상처를 치유하기는 커녕 자기 상처의 진실을 회피하며 침묵을 선택한 어른은 달리고 또 달린다. 상처에서 출발, 혹은 탈출해 회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두려워서 회피하고 싶은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 직면하기까지 우..
드물게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난주에 본 같은 영화가 그렇다. 영화 는 도입부부터 나를 홀리고 꼬시다가 몸이 풀리면 빌드업을 하고 마침내 역전골 같은 펀치 라인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빽빽한 여백을 선명하게 적어놓은 시처럼 자유로운 상상을 부추겼다. 그런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휘발되지 않은 채 마음에서 살아 숨을 쉰다. 뭐랄까, 곤히 잠든 강아지의 다스운 체온과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데 강아지가 슬그머니 몸을 쭉 펴며 기지개 켤 때 느끼는 기쁨 같고, 건조기에서 막 나온 빨래에 남은 따스한 온기 같았다. '오기'는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조막만한 자기 가게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는 그 일을 별 회의 없이 계속한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사람들이 아..
"춥고 황량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려면 웅장한 설계도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입자에게는 목적이 없으며, '우주 깊은 곳을 배회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궁극의 해답' 같은 것도 없다. 그 대신 특별한 입자 집단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중에서 나의 조상이 내 몸에 새겨 놓은 유전자 덕분에 나는 종종 일탈을 꿈꾼다. 현재 누리는 삶이 안온하고 익숙하며 일상이 지나치게 확실해서 외려 불확실하거나 미묘한 곳으로 떠나는 때가 있다. 바람 한점 없는 따뜻한 날씨 같은 풍요 속에도 고달픈 부분이 있어서 그 평범한 생활로부터 나를 소외하며 집이 아닌 노지나 호텔로 향한다. 나는 그렇게 살도록 생겨 먹은 사람이지만 내가 직면한 현실은 나의 탈출을 쉽게 허락하..
↑영화 시작 전. 스크린 양옆 커튼이 접히고 화면 크기가 커지며 영화가 시작한다. 1. 극장은 한발 물러서야 볼 수 있는 세계다. 스크린과 일정 거리를 두어야 영화가 골고루 보인다. 거리가 너무 멀어도 선명도가 떨어져 세부와 생생한 현장감을 놓친다. 2.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 이야기를 다뤘다. 사람은 너나없이 익숙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 용케 살아남는 서사를 쓰다가 생을 마친다. 식물의 씨앗이 모체를 떠나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르는 천신만고 끝에 뿌리를 내리고, 이민자가 모국을 떠나 낯선 세계서 가까스로 정착한 서사도 그와 유사하겠다. 3. 부부의 세계 또한 이민자가 마주하는 환경처럼 각자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이 '이민'이라면 '결혼'은 자기를 떠나 다른 ..
영화 한 편 소비하는 일이 갈수록 쉽다. 극장에 가지 않아도 아무 때나 넷플릭스나 아마존 등에서 골라 보다가 영 내키지 않으면 도중에 그만둔다. 영화 한 편 퍽 쉽게 잊힌다. 대개의 영화는 특별하지 아니하여 예사로운 예측 안에 머문다. 대체재가 시장에 널린 영화의 유효기간은 짧고 영화와 사귄 추억도 바삐 사라진다. 흑백 영화 "위 아 40"은 다채로웠다. 캐릭터의 매력과 찰진 대사, 빼어난 편집 역량이 유머와 함께 흑백 영화 구석구석을 빛냈다. 인간의 노화는 사실 아무리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외쳐도 슬픔이고 때로 수치이며 공포다. 감독은 그 무거운 주제를 목청껏 18번 부르듯 제대로 통제하며 탄력과 활기, 자신감과 재생력을 잃어가는 중년의 이야기를 쾌활하게 그려냈다. 인내심 부족한 내 엉덩이도 영화에..
"문빠 현상이 노무현에 대한 집단적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홍위병 정치’, ‘문민 독재’, ‘반지성주의’라고 비판하는 소위 정치 전문가들은 그 현상에 대한 진단에 있어서도 대응에 있어서도 모두 틀렸다. 문빠들은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마땅히 이끌어내야 할 교훈, 즉 비판적 지지의 신화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냈다.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며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노무현 정부의 소소한 실수나 한계를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가 보수 언론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을 때 정치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답시고 뒷짐 지고 있던 비판적 지지 세력은 노무현 정부에 적대적인 보수 세력만큼, 아니 그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절감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박경희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중 전문 이승에서는 어떻게든 꿈을 이루려 눈코 뜰 새 없이 일손을 놀리더니 저승 가서도 뭐 하느라 바쁜지 코빼기도 디밀지 않더군요.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라고 트집을 잡아 따져묻고 싶은데, 어느 날 꿈에 잠시 틈내어 다녀가면 그늘진 마음이 불을 밝히지 않아도 환해져요. 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언감생심 나도 앙큼한 꿈을 꾸었지요. 네, 나는 겉으로는 얌전을 떨면서 속으로 호박씨를 깠어요. 만약 꿈에서 깨지 않았더라면 결정적 장면이 뒤이었을 거라고 입맛을 다시지만, 어머니의 백일몽도 감질나게 뜸만 들이다 끝났나 봐요. 그래요, 필요할 때 없거나 모자라면 안타까워요. 어떤 꿈은 악몽이어서 꿈속에서도 깨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꿈을 깨면 한낱 꿈이어서 서운하고..
알 만큼 알고 해볼 만큼 해본 나이 중년. 그래도 뜻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 변수로 인해 인생이 좋은 쪽이나 나쁜 쪽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최악이다 싶은 순간조차 행운은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루이 암스트롱처럼 끝장나게 노래한다.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파리, 이탈리아 하면 왠지 기분이 들뜬다. 막상 가면 별의별 일이 다 생겨 역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지만 그래도 파리라는 고유명사를 떠올리며 우울할 보통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우아한 여인이나 매사에 섬세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남자가 동행한다면, 매일 드나드는 집처럼 뻔한 행복을 탈출하고픈 욕망이 생긴다. 영화는 정형화된 트로트 멜로디처럼 빤한다. 하지만 나는 중년의 ..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
애플 디자인을 총괄한 조너선 아이브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었다. 애플이 출시한 아이팟은 브라운 휴대용 라디오처럼 군더더기를 제거한 미니멀한 디자인이었다. 입이 저절로 벌어질 만큼 혁신이 돋보였고 유용했다. 쉽게 싫증 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폰에 내장된 계산기 앱 디자인처럼 디터 람스에 대한 오마주였다. 걸출한 장인의 디자인은 복잡한 요소와 구조를 과감하게 덜어내는 자기 철학을 지키면서, 조잡함은 단호히 거부하는 고집 또한 꺾지 않으나, 언제나 실용적이다. 오래 곁에 두어도 세련된 맛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크다. 낡아도 쓸만하다. 대단한 솜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