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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한 줄로 압축한 제목은 <결혼 이야기>인데 실은 이혼 이야기다. 결혼의 진척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조금씩 실망하는 과정이거나 이혼까지를 포괄하기 때문인 듯하다. 대신 우울하지 않다. 극 중 '애덤 드라이버'는 직업이 연출가이고 '스칼렛 요한슨'은 배우다. 남편은 부인에게 자기..
이 영화 좋다. 실제 인물과 매우 흡사한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의 연기는 두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은 상반된 성격을 가졌다. 각자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고집스러운 원칙이 있어서 상대를 향해 쓴소리하거나 눈살을 찌푸린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원인을 캐묻고 답을 요..
소설 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 첫 문장 바로 앞서 작가는 '하는 말', 즉 서문을 썼다.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 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눈을 부릅뜨고 객기를 부리는 글이 있다. 선 굵고 점잖은 어휘를 골라 쓰지만 음흉한 속내가 빤히 비치는 글도 숱하다. 그..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첫문장의 첫인상이 강렬하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과학과 문학과 철학을 적절히 아우르는 낭창낭창한 글을 썼다. 일테면 절친과 술한잔 하면서 우리 현실이 얼마나 엉뚱한지를 신나게 떠..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박경리 작가가 1973년 6월 3일 밤에 쓴 서문 중 마지막 문단이다. 2001년 작가는 2002년 판 서문을 아래 문단으로 시작한다.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 과거라는 드넓은 허무와 미래라는 막연한 적막이 만연한 허허벌판에 홀로 우뚝 선 태양이 하릴없이 열을 ..
나의 일상은 마음에 쏙 드는 새로운 음식이 연이어 나오는 풀 코스 정식이 아니다. 뱅글뱅글 맴도는 일의 반복이다. 패터슨이 모는 버스는 딱 행복한 지점만을 골라 항구적으로 안착하거나 지름길을 택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어제 만난 승객이 오늘 다시 그가 운전하는 버스에 오른다. 다들 몇 개쯤은 보듬고 살 고민도 덩달아 마음에 올라탄다. 패터슨은 그것들을 죄다 끌어안고 버스를 몰며, 창밖 풍경이 변하듯 어제와는 어딘가 다를 나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 영화는 판에 박은 듯한 자극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유혹하지 않았다. 카메라는 패터슨의 엇비슷한 매일을 게으름뱅이처럼 관찰한다. 기승전결 없는 그 서사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싱거운 현실 안에도 어쩌면 인생 전부와 맞바꿀만한 의미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이것은 소소한 이야기다. 히어로나 판타지가 부재한 서사로 일정 수준의 관심을 끌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임에도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다. 그리고 우아하다. '리듬(rhythm)'은 '흐른다' '움직인다'는 뜻의 동사 'rhein'을 어원으로 하는 그리스어 'rhythmos'에서 유래했다 오프닝 시퀀스에 왈츠를 추듯 화면을 우아하게 가로지르는 지게차가 등장한다. 그때 흐르는 배경음악은 요한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그 리듬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출근, 근무, 퇴근 등 모든 것이 기표가 된 세상에서 블루칼라 계층이 좀체 맛보기 힘든 형식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건물은 사람이 쇼핑에만 전념하도록 애초에 창문을 설계하지 않는다. 그곳의 제품과 드나드는 인원은 다양한데 의외로 본질은 단순하다. 사실 대형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