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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 를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동명 단편소설은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번에 다시 들춰봤다. 2.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들을 다독여 회복으로 이끄는 줄거리다. 좀 식상한 듯한 그 모티브를 다룬 영화의 러닝타임이 무려 179분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내가 모르던 배우인 "미우라 토코"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 그녀를 발견한 기쁨이 컸다. 3. 주인이 잘 관리한 빨간색 사브 900(원작에서는 노란색 사브 900 컨버터블)이 정속 주행한다. 상처를 치유하기는 커녕 자기 상처의 진실을 회피하며 침묵을 선택한 어른은 달리고 또 달린다. 상처에서 출발, 혹은 탈출해 회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두려워서 회피하고 싶은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 직면하기까지 우..
1. "파친코"는 올해 들어 손에 잡은 첫 소설인데 술술 잘 읽혔다. 완독 하느라 21시간을 썼다. 하루 4시간씩 투자하면 5일이 걸리는데 흥미로운 작품이라 4일 만에 끝냈다. 2. 시대 순으로 전개한 편년체 형식의 소설은 개인과 가족의 역사를 다루면서 사회사를 포괄한다. 작가는 몹시 험난했던 자이니치의 여정을 재구성하면서 영리하게 다음 장이 궁금하게 만들고, 단 한 문장으로 가슴이 철렁하는 경험(2권 '노아' 관련)을 선사한다. 3. 한국의 지난 100년은 불우했다. 자기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나라와 국민은 우왕좌왕 갈팡질팡했다. 매판과 친일은 우울과 조증처럼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친일과 항일이 대립했고 디아스포라와 동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했다. 일본 지배세력..
1. 대선이 끝났다. 지역주의와 세대, 젠더 갈라치기가 결국 먹혔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그 혐오의 불길 확산에 유권자들이 거침없이 불쏘시개가 되었다. 2. 조국 씨가 눈에 밟힌다. 조국 일가와 문재인 씨의 앞날은 감정 조절, 사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한 맹수의 아가리에 내던져졌다. 검찰개혁에 나선 정권이 검찰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생각하면 정말 의아하기 짝이 없지만 남 탓하며 손가락질 하는 건 또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3. 정치인 이재명의 진면목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김동연 씨와의 대담과 정책 연대, 정치 교체를 위한 행보를 지켜봤다. 마지막 유세에서 윤석열 씨를 향해 한 말과 승복 선언은 울림이 컸다. 그는 의외로 성품이 모나지 않고 원만했다. 이번 선거로 그는 위험 인물로 단단히 찍혔다. 그가 부디 ..
1. 뒤축이 해질 대로 해져 바늘과 실로는 꿰매기 힘든 양말을 신은 입성 초라한 사내가 전두환 씨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남자는 제복을 입지 않았는데 군모를 썼고 평상복을 입은 민간인인데 거수경례를 한다. 그의 정체는 애매하지만, 다른 설명이 없어도 남자의 볼품없는 행색으로 현재 신분이 쉽게 식별된다. 그는 한 나라를 손아귀에 쥐고 호사스러운 삶을 살다 간 사람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데, 아이러니한 사진을 보는 내내 웃음으로 환멸과 냉소를 표현하는 블랙코미디를 볼 때처럼 쓴웃음이 나왔다. 괴상하고, 엉뚱하고, 부자연스러운 부조화가 선뜩해서 그로테스크를 느꼈다. 2. 더러는 전두환 식의 삶을 내면화, 표준화하고 살면서 폭군이 완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주군의 삶에 경의와 충성심을 내보인다. 그들은 상위..
다저녁에 부고를 받자마자 장례식장 다녀오는 길. 시속 11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창밖 풍경이 꼭 시절인연처럼 지나간다. 살면서 제철 과일처럼 한창이던 사람 있었고, 또 사람 있었고, 또 사람 있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떤 모습일까. 옛날 비포장 신작로나 허름한 골목길을 걷다가 빈깡통이 보이면 툭 걷어차던 심심한 심정으로 죽음을 슬쩍 엿보고 왔던 길 되짚어 돌아온다. 한 사람 떠난다고 외로울 사람 이 지구에 몇이나 있을까. 사람에게 너그러운 곳과 박한 곳은 저승일까 이승일까. 한 사람이 떠난 장소는 이전과 얼마큼 다를까. 죽었다 살아난 경우만 기적일까. 살다가 죽는 경우도 이승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불가사의한 기적이 아닐까. 늙고 병든 사람이 죽는 일은 사는 일보다 못할까, 더 나을까를 생각하며 달리는데 지난..
1. 해 나왔다 비 오시고 비 오시다 해 나온다. 올 장마는 늦는다고 하니 지금 본격 장마철이 아닌데 비가 잦다. 손가락 클릭 몇 번으로 사다 먹는 나는 상관없지만 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으며 잘 영글길 바라는 이들은 작황과 수확량을 걱정하며 하늘 보는 일이 잦겠다. 태풍과 우박, 긴 장마 등은 농부의 최선만으로 막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도, 세상도, 하늘도 종잡기 어렵다. 2. 나이 든 사람들은 곧잘 "늙으면 밥심으로 산다"라고 한다. '늙은 사람이 밥을 더 많이 먹는다'며 "헌 섬에 곡식 더 든다"는 속담도 있다. 임명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의나 공직 윤리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정치중립을 걷어찬 나이든 고위공직자들도 배가 고픈가 보다. 그들은 자기 권력욕을 문재인 탓으로 돌리며 책임회피로 일관..
1. 좋은 영화나 책을 만나면 늘 그렇지만 영화 "스모크"를 보고 나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주제로 유시민 작가와 이동진 평론가가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2. 아마도 그들의 사유는 싱싱하게 빛나는 오월 같겠지. 어떤 감상은 밝고 찬란한 기운을 향해 벙근 목련 같아서 나 혼자 싱그레 웃을 테고, 어떤 해석은 무성한 여름 같을 것이며, 어떤 관점은 단순 명쾌해서 무릎을 탁 칠 거야. 또 어떤 대목에선 싸늘한 늦가을 밤공기처럼 서늘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찬바람이 일겠지. 그러다가 그 냉기를 거두는 모닥불 온기 같은 훈훈한 위로도 잊지 않고 보탤 테고. 3. 진부한 세상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들의 성격은 원만하지 않고 까탈스러울 거야. 취향도 분명 별스러울 두 사람은 작품의 차이..
드물게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난주에 본 같은 영화가 그렇다. 영화 는 도입부부터 나를 홀리고 꼬시다가 몸이 풀리면 빌드업을 하고 마침내 역전골 같은 펀치 라인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빽빽한 여백을 선명하게 적어놓은 시처럼 자유로운 상상을 부추겼다. 그런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휘발되지 않은 채 마음에서 살아 숨을 쉰다. 뭐랄까, 곤히 잠든 강아지의 다스운 체온과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데 강아지가 슬그머니 몸을 쭉 펴며 기지개 켤 때 느끼는 기쁨 같고, 건조기에서 막 나온 빨래에 남은 따스한 온기 같았다. '오기'는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조막만한 자기 가게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는 그 일을 별 회의 없이 계속한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사람들이 아..
어버이날 엄마 보러 다녀왔다가 몸살 앓았다. 이틀 동안 잠을 거의 못 자서 피로가 누적됐나 보다. 몸 상태가 완전 메롱이었는데 삭신이 쑤시고 맥이 풀려 물먹은 솜처럼 축 처졌다. 그 덕분에 "잠들기 글렀으니 책이나 볼까" 하는 생각이 끼어들 새 없이 잠은 푹 잤다. 돈 아끼듯 몸을 아껴야 하는 나이인가. 여행 못 가 몸살이 나는 때가 있는데 웬걸, 마음을 따라잡기엔 체력이 달린다.
"춥고 황량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려면 웅장한 설계도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입자에게는 목적이 없으며, '우주 깊은 곳을 배회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궁극의 해답' 같은 것도 없다. 그 대신 특별한 입자 집단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중에서 나의 조상이 내 몸에 새겨 놓은 유전자 덕분에 나는 종종 일탈을 꿈꾼다. 현재 누리는 삶이 안온하고 익숙하며 일상이 지나치게 확실해서 외려 불확실하거나 미묘한 곳으로 떠나는 때가 있다. 바람 한점 없는 따뜻한 날씨 같은 풍요 속에도 고달픈 부분이 있어서 그 평범한 생활로부터 나를 소외하며 집이 아닌 노지나 호텔로 향한다. 나는 그렇게 살도록 생겨 먹은 사람이지만 내가 직면한 현실은 나의 탈출을 쉽게 허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