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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었다. "이제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편히 쉬는구나 죽으면. 아, 나도 좀 일찍 죽었더라면 편히 쉬고 있었을까. #2 좋은 영화는 노트북으로 봐도 좋고 IP TV로 봐도 좋으나, 일반 영화관에서 보면 좀 더 좋고 아이맥스나 4D로 보면 더더욱 좋다. 세계 최대 IMAX관이라는 CGV 용산은 부족한 게 별로 없다. 그곳에서 를 보면 다른 아이맥스 스크린의 두 배에 달하는 화면발과 음향이 몰입도를 확장하기에 약간은 좋다. 그런데 일반 영화관에서 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그 장점이 모두 사라진다. 하물며 다른 디바이스에서는. 세상은 일사불란하게 '피에타'를 명작으로 납득하지만 신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죽어간 예수에 비해 지나치게 젊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
#1 8월의 마지막 날 상현달 까지의 거리는 대략 405,010km. 여기서도 너무 선명한 달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너는 도대체 얼마나 먼 것이냐. #2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계획이든 부주의든, 알고서도 저질렀다면 참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거잖아. 그때는 부모라는 사람들도 철이 없어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모르고 낳았을 거야.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3 오후 한때 흐린 어느 날, 등을 둥글게 모은 초승달이 저녁 하늘을 발자국 투명하게 걸어갔다. 그 큰 하늘도 달 하나 살기엔 적당한 공간처럼 보였다. 가만 보니 내 달 옆에서 올바른 지점에 위치한 잘 닦인 별 몇 개도 반짝. #4 신호에 멈춰 서서 바라본 사방이 문득 애매했다. 무사고 운전으로 착실히 주행거리는 늘리는데 정작, 나..
지난 5월 25일에 벌어진 일이라 한다. 서울대공원에 있는 아기 코끼리(한 살)가 실수로 물에 빠졌다. 엄마(열세 살)는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근처에 있던 이모(서른여섯 살) 코끼리가 쏜살같이 달려와 엄마를 이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새끼를 구했다. 침착하게 상황을 해결한 ..
마음을 위한 일에는 항상 몸의 역할이 있다. 몸이 기댈 데도 마음밖에는 없다.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세상이라도 자신이 쓰러지는 걸 방치하는 자기란 없기에, 겪고 사는 일 다를 바 없는 모든 꽃 봄 되면 새 꽃 밀어 올리고, 사람은 마뜩잖은 몸뚱이 곧추 세운다. 이미 써먹은 '언젠가는'..
사는 일은 눈 많은 겨울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머물기에는 시리고 추우며 아련한 통증까지 안긴다. 그 한철을 용케 버티는 데 가장 넉넉한 것은 타인의 호의가 아닌 자기 주머니에 자기 손을 넣는 일이다. 끙, 소리 한마디 없이 웅크린 채 눈을 맞는 훌륭한 개가 그러하듯, 산목숨들이 지상에 예비해 놓아야 하는 거처는 자기 체온이 유일하다.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는 서 있어야 해, 챔피언의 펀치를 견디며. 사각의 링은 사사로운 핑계 없이 한 사람이 상대가 아닌 그 자신과 먼저 싸우는 곳이야. 행운의 펀치도 자세를 추스려 상대를 향해 한 발 다가설 때 가능한 것이지. 언제나 죄를 짓는 쪽은 변명이었지 실패가 아니었어. 후회는 패배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다리 풀린 너를 다시 괴롭힐 거야. 15회만 버티면 돼. 다행히도 그러면 끝나...록키처럼."
길에는 그를 눕히려는 은밀한 심술이 가득 누워있는데, 벤츠 옆을 지나는 삼천리 자전거 제 앞가림한다. 어떤 희망을 싣고 있는지, 내가 모르는 곳에 당신의 희망은 따로 있는 것인지 빈약한 수단으로 위험을 방어하며 나아간다. 누군가는 삶의 중심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그 무대에 끝내 다다를 수 없을 테지만 각별히 조심하여 당신은 끝내 다치지 마시라. 한 번 넘어져 생긴 어떤 상처는 겉으론 멀쩡하지만 끝내 속병이 되기도 하고, 세상은 쓰러져 실패한 듯 보이는 자들에겐 동정심이 많지가 않으니. 구시렁 ⓒ 박대홍
1은 2진법 논리가 적용된 세상에서 절반의 규모를 차지하는 수다. 1을 1에 곱하면 1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수에 1을 곱하면 1이 아닌 그 수 자신이 된다. 1 다음으로 큰 자유수는 2다. 개별적 존재 1이 대립면을 경험할 때 만나게 되는 2는 첫 번째 소수이자 유일한 짝수다. 합성수 중에서 처음으로 모든 약수가 홀수뿐인 수는 9다. 9는 한 자리로 쓸 수 있는 가장 큰 수다. 10처럼 다른 것과 묶이지 않은 채 한 자리로 쓸 수 있는 마지막 수,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임을 승인하는 최후의 수다. 살아있는 것들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빈방에 돌아와 홀로 눕는 일처럼 그만 저를 놓고 싶은 심사에도 불구하고 숫자 하나 더하듯 이유 하나 덧붙여 살고자 하는 지점.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열어두려는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