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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콩국물을 샀다. 집에 돌아와 물을 끓이고 국수를 삶았다. 냉장고를 열어 오이를 꺼내 채썰고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잘랐다. 길어온 콩국물을 붓고 새싹채소를 약간 곁들여 고명으로 얹었다. 내리 며칠 콩국수를 먹었다. "이열치열이지!" 유명 삼계탕집과 고깃집에는 사람들이 늘어섰다. 철들며 수없이 목..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각색해 교묘히 서술자의 위치만을 높이는 시들이 많다. 그런 시는 식초처럼 시다. 어떤 시는 새로운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시다 못해 산도가 너무 높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다. 비판의식과 도덕 강박을 내세우는 경향..
할머니가 상여에 실려 산으로 가시던 날이었다. 병색이 완연했던 집안 어른 한 분이 어디 내놔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슬픔처럼 동네 어귀에 앉아 가는 상여를 바라보았다. 세상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면 다음은 틀림없이 자기 차례일 거라고 짐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분도 그 상여에 누워 산에 들었다. 시 속 남자의 실패는 충실하게 복원된다. 남자는 정곡을 찌르는 주먹총 같은 통렬한 공박을 더러 맞았을 게다. 그래서일까. 피워 문 담배 한 개비 같은 헛헛한 물음만 물으며 오래 못 살아 억울하다고 호들갑은 떨지 않는 맷집을 선보인다. 그 쉽지 않은 일을 그는 해낸다.
어머니의 잘못은 아닌데도 막거나 피하지 못한 가난이 있었나 보다. 대학 보내달라는 자식에게 기꺼이 져주고 싶었을 테지만, 그녀의 빈곤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와 '미안하다'를 겨우 누룽지로밖에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미리 일러주듯, 구차해도 먹이는 먹고, 살겠다고 버둥대며 계속 살아가라고 누르고 누른 속 같은 누룽지를 넣어준다. 뒷전으로 밀린 아들은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리는' 걸로 그에 응답한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린' 가난이니 서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훗날 아들이 떠난 고향 집에 남은 어머니는 해마다 그때의 가난 같은 자두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을지 모른다. 삶에서 당당히 직진하고 싶었던 우리에게, 통제에 따르라 경고하며 꿈의..
힘껏 살다가, 폼나게 사표를 던지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삶에선 누구나 다 임시직이어서 그런지 정직(正直) 하기도, 정직(正職)되기도 어렵다. 모든 게 내 탓이라지만 모든 게 당신 탓만은 아니다. 따로 용서를 구할 일도, 희망이라는 질병을 견디느라 머리를 싸맬 일도 아니다. 어차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