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홍이 (4)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솔직하게 말입니다. 저는요, 송관수 김길상 그분들을 우러러 받들 만큼 어리지도 않고 자신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도 꾸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애..
"맞는 놈 때리는 놈, 도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없어지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밥그릇 크기를 따져서 생긴 일입니까? 진주서 농청과 백정이 싸웠을 때도 이해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짓밟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의 본성." (…)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 본성, 본성 말입니다. 밥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위냐 너가 위냐, 그것 때문에 더 많이 때리고 맞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구요. 재물이나 권력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등이면 굶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다 많은 재물, 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는 것은 실상 배고픈 것하고 절실하게 관계되는 것..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 쓰라렸던 것. 그것은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 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
"홍아." "예." "니하고 나하고는 시작도 못하고… 내가 늙어부린 것 겉다." 홍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을 시작해 보지도 못하였는가 잘 알겠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정의도 나누어보지 못하고, 그리고 죽을 날이 가까워왔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 "니는 이곳에 정이 안 들 기다. 그라고 니가 이곳에 있어 머하겄노. 얽매이서 사는 것은 내 하나로 끝내는 기다. 니 뜻대로 한분 살아보아라. 내 핏줄인데 설마 니가 나쁜 놈이야 되겄나." "아, 아부지이!" 중풍으로 쓰러진 이용(龍)이 평사리로 돌아왔다. 아들 홍(弘)이를 데리고 선영에 간 용이는 생모에 대한 증오와 젊은 날 자신이 안팎으로 표출한 갈등과 분노에 상처 받아 비뚤어져 가는 홍이에게 얽매여 사는 것은 그 자신으로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인연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