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박경리 (34)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봄아 봄아, 우찌 그리 더디 오노. 고봉준령 넘니라고, 허리 아파 쉬니라고 더디 오나. 산 밑에는 명춘화 산수유도 피었일기고 까치는 안짱걸음 걸음시로 고개 넘어 손(客) 온다고 까까 거릴 긴데 첩첩산중 이골짝은 우찌 이리도 적막강산인고." (…) 춘매는 봄이 더디 온다고 푸념하곤 했었다. 그러던 춘매도 이른 어느 봄날, 꽃바람에 할미 죽는다는 말을 뇌면서 세상을 떴는데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어찌 됐든 차면 달 기울듯 올 것 오고 갈 것 간다. 으레 그런 줄 알면서도 봄을 기다린다. 님이든 독립이든, 저절로 즐거워지는 정말 그냥 봄이든 그러니까 봄에 투사하는 마음과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그 속도에 대한 감각도 상대적이다. 소설 에는 작가의 일본론을 비롯해서 귀 기울일 만한 사유..
"신비와 현실적인 두 관념을 수용한 것에 한(恨)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본 말로는 한을 원한으로 쓰고 그것은 복수라는 묘하게 엽기적인 분위기를 갖는데 우리가 말하는 한에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한이 된다, 한이 맺혔다, 할 때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빼앗겼든 당초 주어지지 않았든지 간에 결핍을 뜻하고, 한을 풀었다, 할 때는 채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해서 결핍은 존재할 수 없는 방향으로, 채워졌음은 존재하는 방향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생명 자체에 관한 거예요. 한은 생명과 더불어 왔다 할 수 있겠어요. 한의 근원은 생명에 있다 할 수도 있겠어요. 흔히 지옥이다 극락이다 하는 말을 쓰는데 하나는 공포의 상태, 하나는 안락의 상태, 그것은 정지된 상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극..
"지난날을 생각허믄 모두가 다 후회스러운 일뿐인디 그 후회스러운 날들이 그립단 말시." "이제는 나이도 들고 했는데 편키 살다 가야 안 하겄소." "주막 뜯어 개여라 그 말인디, 넘들도 그런 말 많이 허지라. 그러나 사람 못 보고 워찌 산디야? 오는 사람보고 가는 사람보고 날아가는 까마귀보고도 내 술 한잔 먹고 가라 하고 접은디, (...)" 먼 길 가다보면 피곤하다. 독서도 마찬가지.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책이 안 읽히는 날도 있다. 그런 날 영산댁의 말이 정답다. 여봐란듯이 어깨 펴고 걷지 못한 지지부진, 더딘 인생들 예외 없이 받아들였을 주막에 다 늙은 영산댁이 있다. 함께, 술 한잔 하고 싶다.
"애국, 애족만 내세우면 범죄도 해소되는 그 기만을 수긍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민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부정했을 뿐이야." (…) "애국심이나 국수주의는 출발에 있어선 아름답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해지면 질수록 추악해지고 비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빼앗긴 자나 잃은 자가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또 민족주의를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끼 들고 강탈한 자의 애국심, 민족주의는 일종의 호도 합리화에 불과하고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흔히들 국가와 국가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엔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 말은 국가나 민족을 업고서 저지르는 도둑질이나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하..
조용하하고 결혼을 생각한다. 얼레설레 아차! 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결혼. 그가 귀족이 아니었고 자산가가 아니었고 교욱받은 신사가 아니었고, 그랬다면 과연 결혼이 이루어졌을지 그것은 의문이다. 차디찬 분빛과 창백해 보이는 지적인 용모에 명희 마음이 조금은 끌렸던 것을 부인..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 쓰라렸던 것. 그것은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 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
"참꽃(진달래)술도 그게 기침에는 영약인디." 이불을 개켜낸 자리에 걸레질을 하는 숙이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걸레질로 지우며, 영산댁에게 등을 보이며 구석지를 닦는다. (…) 천만병을 고친다는 진달래술. 아비의 병이 천만은 아니었지만 목에서는 항상 가래가 끓었고 끊임없는 기침, 기침의 끝에는 피를 토하곤 했었다. 봄이 되면 더욱 기침은 심해졌고 피를 토하는 도수도 잦았다. 봄마다 봄 넘기기 어려울 것이란 말을 들어야 했었다. (…)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었는가 솥뚜껑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솥전에 떨어져 피식피식!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난다. 숙이는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눈물을 닦고 더운물을 퍼내어 걸레를 빤다. 춘궁기가 아니어도 살길이 막막했던 ..
아비가 누구이든 내로라하고 나서지 않는 이상 양현에게 아비는 없다. 어미는 보다 확실하게 없는 것이다. 양현은 그것을 안다. 생과 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없다는 것은 안다. 조용한 아이였지만 남의 눈치를 보거나 청승스럽지가 않았다. 뛰어가다가 넘어지면 앙!하고 울었으니 울음을 ..
"서러운 사램이 많으면 위로를 받은께. 나보담도 서런 사램이 많은께 세상을 좀 고맙기 생각허게도 되제요. 조선에 남았이면 그 더런 놈의 왜놈우 새끼 똥닦개나 됐일 것이오. 누가 뭐라 뭐라 혀도 여기 온 사람들, 나쁜 놈보담이사 좋은 사람이 많질 않더라고? 이 주갑이야 본시부터 사람..
"민족의식이란 가지가지 낯판대기를 지닌 요물이야. 악도 되고 선도 되고 야심의 간판도 되고 약자를 희생시키는 찬송가도 되고…… 피정복자에게 있어서 민족의식이란 항쟁을 촉구하는 것이 될 테지만 정복자에게 있어서의 민족의식이란 정복욕을 고무하는 것이 되니 말씀이야.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 혹은 충성심,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인간 최고의 도덕이면서 참으로 진실이 아닌 괴물이거든. 집단 생존본능이요 집단의 탐욕을 아름답게 꾸며대는 허위, 어디 민족이나 집단뿐일까? 일가에서 개인은 어떻고? 결국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투쟁 아니겠나?" 옷이 날개다. 온갖 것을 치장하고 돋보이게 하는 형식미처럼 옷이 없다면 눈 둘 데 없이 그냥 민망하고 뻔한 몸뚱이만 남는다. 그것으로는 서로 차이를 만들거나 우열을 가릴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