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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화학반응 / 박철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박철 시집 『없는 영혼에도 끝은 있으니』중 전문 언어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을까. 이를 달리 말하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천 냥으로도 갚을까 말까 한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토씨 하나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한마디 말은 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며 세상을 달라지게 할만큼 힘이 세다. 사람은 언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비가 오는 날과 볕이 많은 날은 기분부터가 다르다. 아침과 저녁때의..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올고 비는 내리고 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