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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혜수가 이사를 간다. 만난 지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사를 간다. 혜수 좋아하는 남자는 얼른 고백해야 한다. 윤수진 / 장곡초등학교 5학년 / 쉬는 시간 언제 오냐 / 휴먼어린이 몸집 작고 나이 적은 어린이가 쓴 아이 손바닥만 한 동시를 읽다 잠시 흐뭇하다. 아무렴,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은 때가 있지. 마음 주고받는 일도 월급이 통장에 들고나는 것처럼 제날짜 어김없어야지, 때를 놓치면 여기저기에 탈이 나. 영악한 어른들은 머리 씀씀이가 헤퍼서 그런지 있어 보이는 고급 문장, 남과 다르게 보일 형식에 집착하는데 아이들은 마음씀씀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시'는 생각과 글자를 모으고 깎아 낯선 형식을 만드는 것일 테지만, 이렇듯 미소와 뭉클한 감정을 문득 나타내거나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 전문 팬티가 떡하니 제목에 올라앉았다. 뻔한 이야기로 침 튀기지 않고 속옷 한 장으로 속내를 털어놓을 셈인가. 교통사고로 이승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뻔한 시인은 자신이 죽으면 그의 몸이 남의 손에 맡겨질 것을 아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그를 보호하던 ..
"법무부는 고 김승효 씨의 삶을 일그러뜨린 주요한 가해자였다. 김승효 씨에 대한 고문은 중앙정보부가 자행한 것이지만 검찰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모른척했다. 특히 법무부는 고문 후유증으로 조현병이 발병한 김승효 씨가 구금되어 있던 2662일 동안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은 채 방치했고, 김 씨는 결국 증세가 악화돼 영구적인 장해를 입게 됐다. 또 법무부는 끝까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며 손해배상 책임을 부인해, 고 김승효 씨가 별세할 때까지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https://newstapa.org/article/Mmhvz [변화]영화 주인공 故 김승효 유족, 손해배상 2심도 승소 [변화]영화 주인공 故 김승효 유족, 손해배상 2심도 승소 newstapa.org 나는 허우..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에 만나는 첫 작품으로 갈무리해놓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대단할 것 같지 않은 노인은 20대 초반부터 다른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단한 삶을 걸어왔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대개 자기 자본과 권력을 드러내면서 더 위세 당당한 현재, 더 안락한 노후, 더 장엄한 장례식 등을 염두에 두는데, 남을 돕자고 자기 자신에게 단호하고 엄정했을 어른의 생애와 마음 궤적은 믿기지 않을 만큼 검박해서 놀라웠다. 혼자 그런다고 세상이 크게 바뀔 리 없는데도, "어른김장하"는 어른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월 가고 형편 좀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당연하게 여기며 까맣게 잊기도 하는 세상에서. 어른 노릇 함부로 하는 어른들 숱한 세상에서. https://youtu.be/TcKPAl3wuM4 ht..

"신작 에 이르러 관객이 박찬욱식 멜로드라마를, 혹은 그 변태성을 전에 없이 화제로 삼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건 이번 영화의 연인이 그나마 보편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용이한 인물들이라서 일 수도 있다(동시대 인간이고, 헤테로섹슈얼이고, 근친이나 적이 아니다). 혹은 마침내 연애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자 플롯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다. 욕망의 문답은 취조와 심문의 언어를 빌려오고 정의, 진실, 예의 같은 다른 범주의 인간 행위가 끌려들어온다." 김혜리 기자 박찬욱 감독 인터뷰 부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51883.html 박찬욱 감독을 만나다…헤어질 결심, ‘사랑’을..

박찬욱 감독에 대한 나의 선입견과 "헤어질 결심"을 하였다. 그의 기존 작품은 김기덕 영화만큼이나 내겐 정서적으로 큰 충격이어서 그동안 부러 외면하였는데, "헤어질 결심"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 머릿속에서 기꺼이 재생하는 수작이었다. 영화 포스터가 마치 색맹 색약 판별에 사용하는 색각검사 색판 같다. 유사 색점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숫자를 발견하는 그 색판을 내밀며, "자, 이 사랑의 정상 여부와 영화의 미세한 차이를 판별해 보아요!"라고 미소 짓는 것 같다. '서래'의 집 푸른 벽지는 파도 형태를 띠면서도 산의 능선처럼 보인다. 이 사랑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 너무나 선명하거나 미묘한 미스터리일 것이다. 자기 너머에 있는 의심스러운 존재를 알아맞히는 게임이 시작된다. 사건과 감정은 바로 말하지 아니하는..
우리 아버지가 어제 풀 지러 갔다. 풀을 묶을 때 벌벌 떨렸다고 한다. 풀을 다 묶고 나서 지고 오다가 성춘네 집 언덕 위에 쉬다가 일어서는데 뒤에 있는 돌멩이에 받혀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풀하고 굴러 내려와서 도랑 바닥에 떨어졌다. 짐도 등때기에 지고 있었다. 웬 사람이 뛰어와서 아버지를 일으켰다. 앉아서 헐떡헐떡하며 숨도 오래 있다 쉬고 했다 한다. 내가 거기 가서 그 높은 곳을 쳐다보고 울었다. 안동 대곡분교 3년 김규필, 1969년, 시집 , 양철북 아비가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고 휘우뚱 기울어졌다. 시를 쓴 아이는 풀 죽은 아비가 마음에 걸려 그가 고꾸라진 곳을 부러 찾아가 운다. 그들이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주저앉은 지점에서 나도 호흡을 고르며 잠시 쉰다. 엊그제 입동이 지났다. 낮..

누가 보면 사는 낙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연애를 하지. 이런 거라도 안 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반문하듯이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침침한 눈으로 책을 끼고 살다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의 '매버릭'이 36년 만에 살아 돌아왔다. 오매불망 기다린 너무너무너무 전형적인 오락영화다. 세월의 간극이 고스란히 얼굴에 남은 '매버릭'.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의 콜사인이자 영화의 부제, 혀 꼬부라진 영어로 "매버릭(maverick)"은 개성이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을 일컫는다. 고집불통 매버릭은 여전히 삐딱하다. 전투기는 F-14 톰캣에서 F-18 슈퍼호넷으로 바뀌었지만 그가 주로 타는 것은 삐딱선이다. 세월 참 빠르다. 매버릭과 내가 "자, 인생아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라고 호기를 부..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밤낮없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하루가 멀다고 서로 격렬한 말다툼을 벌이거나, 눈을 까뒤집고 호통을 치다가 마침내 뺨따귀를 사정없이 올려붙이고 머리칼이나 멱살을 움켜잡고 싸운다. 그러다가 꺼억꺼억 운다. 맛을 돋우기 위해 짜고 맵고 쓰고 시고 단 양념으로 버무리고, 지나치다 싶게 차거나 뜨거운 국물 음식 같은 빤한 전개가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재료를 개운하게 하고 더부룩하던 속을 풀 때가 있지만, 소화기관 스트레스 등으로 거북하여 부러 피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 영화는 잠풍 같다. '오즈 야스지로'나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처럼 구성 규모가 작고 감정이 차근히 가라앉아 잠잠하다. 영화는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콜럼버스'를 배경으로 삼아 자기..

1. 를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동명 단편소설은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이번에 다시 들춰봤다. 2.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들을 다독여 회복으로 이끄는 줄거리다. 좀 식상한 듯한 그 모티브를 다룬 영화의 러닝타임이 무려 179분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내가 모르던 배우인 "미우라 토코"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 그녀를 발견한 기쁨이 컸다. 3. 주인이 잘 관리한 빨간색 사브 900(원작에서는 노란색 사브 900 컨버터블)이 정속 주행한다. 상처를 치유하기는 커녕 자기 상처의 진실을 회피하며 침묵을 선택한 어른은 달리고 또 달린다. 상처에서 출발, 혹은 탈출해 회복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두려워서 회피하고 싶은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 직면하기까지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