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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오징어채 안주 삼아 칭따오 무알콜 맥주 마시며 "원소의 왕국"을 읽는다. 책 표지에 구멍이 뚫려있다. 세상을 이루는 핵심 요소인 원소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 같다. 내가 사는 세계의 내부도 서로 부딪치고 달라붙어 알갱이를 이룬다. 그러다 분리, 붕괴한다. 한낱 물질에 불과한 나의 몸과 사람이 쌓은 업적은 마침내 흔적도 없이 흩어질 것이다. ↓애피타이저 같은 머리말을 맛보려 첫 숟갈을 뜨는데 그만 돌을 씹은 듯하다. "원소의 왕국의 안내서." 역자가 굳이, 혹은 무심코 곁들인 "의"에 그만 탈이 났다. 글을 다루는 전문가조차 조사 "의"를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남용한다. 원소의 왕국 안내서. 별 의미 없는 "의"는 덧붙이지 않는 게 낫다. 그 다음 문장도 어딘가 이상하다. "나는 서머셋 몸의 「진노의 그릇」..
배신월(拜新月) 초승달에 절하다 이단(李端) 開簾見新月 卽便下階拜 개렴견신월 즉편하계배 細語人不聞 北風吹裙帶 세어인불문 북풍취군대 발을 걷어 초승달 보자마자 계단을 내려가 절하였습니다. 나지막한 말은 들을 이 없고, 북풍만이 치마끈을 날리었습니다. 초승달은 낮에 떠서 일찍 진다. 그 달이 아주 넘어가기 전에 여인은 아무도 모르는 틈에 커튼 같은 발을 걷고 나선다. 각자의 사연 일일이 말하자면 길 터인데 시는 짧다. 묵언 수행하듯 눈과 귀만 열어두는데, 서늘한 바람만이 여인의 꼭꼭 동여맨 속내를 슬며시 들춘다. 나는 한 생애가 저 여인의 외출 같다 여긴다.
개막 전부터 화제였던 '에드워드 호퍼' 서울 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림 관람에 더하여 '마크 스트랜드' 씨가 쓰고 '박상미' 씨가 옮긴 《빈방의 빛》을 읽는다. 저자는 퓰리처상을 받고 미국의 계관 시인으로 추대된 시인이자 미술가이며 옮긴이 또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시와 그림에 조예가 깊다. 이 책은 고화질 컬러 도판이 좋은 데다 언어의 사치와 의미 빈곤을 경계하는 저자의 능력이 그림의 가치와 해석을 재생산한다. 성적 향상 교양 쌓기와 전혀 무관한데, 전시회 여운과 함께 하기에는 적절하다. "House by the Railroad(철로 변 주택)"를 다룬 챕터의 제목은 이다. 역자는 '철로 변의 집'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격조사 "의"를 단호히 생략하고도 그림 속 집의..
#1 누가 봐도 변방의 삶이다. 도시에 살며 타인의 욕망을 만나고 그 욕망을 욕망하며 사는 나에게 사진 속 두 남녀는 가난하고 가난해서 의미를 잃은 외곽, 사람들이 더는 찾지 않아 지도에서 지워진 깊은 오지 같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환갑 진갑 다 지났을 남녀에게 나는 묻는다. 남자가 들꽃 한 움큼을 꺾어다 여자에게 건네고 담배 한 개비 물듯 꽃 하나 입에 물었는지. 아니면 여자가 꽃을 따서 남자 입에 한 송이 물려주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를 뻔했다"는 눈빛으로 허름한 어깨에 기댔는지를. 본래 서로 짝이 아니었을 짝짝이 단추는 누가 달았는지를. 살다 보면 사는 일의 거대함과 왜소함, 이 세상에 오고 가는 일의 사소함, 권력층의 교활함과 집요함, 소시민의 소심함과 비열함에 대해서 ..
"개인적으로는.." 방송이나 유튜브 등에서 이 말을 참 자주 듣는다. 자신의 의견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겸손의 태도를 보이는 말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개인"이라는 단어로 3인칭화하는 것은 자신의 의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도 있는 듯하여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옛날에는 대체로 이렇게 말했고, 이게 적절하다. "제 생각에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데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발부터 빼는 태도는 비독립적인 인간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황교익 / 페이스북 나는 그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제 생각에는"을 두고 "개인적으로는"을 앞세우면 말이 벌써 식상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런 표현은 말의 첫인상부터 엉성한 겉멋이 드러나 촌스럽다. 접미..
혜수가 이사를 간다. 만난 지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사를 간다. 혜수 좋아하는 남자는 얼른 고백해야 한다. 윤수진 / 장곡초등학교 5학년 / 쉬는 시간 언제 오냐 / 휴먼어린이 몸집 작고 나이 적은 어린이가 쓴 아이 손바닥만 한 동시를 읽다 잠시 흐뭇하다. 아무렴,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은 때가 있지. 마음 주고받는 일도 월급이 통장에 들고나는 것처럼 제날짜 어김없어야지, 때를 놓치면 여기저기에 탈이 나. 영악한 어른들은 머리 씀씀이가 헤퍼서 그런지 있어 보이는 고급 문장, 남과 다르게 보일 형식에 집착하는데 아이들은 마음씀씀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시'는 생각과 글자를 모으고 깎아 낯선 형식을 만드는 것일 테지만, 이렇듯 미소와 뭉클한 감정을 문득 나타내거나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50억 판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러나 이 소란도 곧 지나고 잊힐 것이다. 세상 물리학을 배울수록 나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을까.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뒤섞는 착란으로 유권자의 태만을 유도하는 언론도 우리 사회 지체와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 더 큰 비극은 민주적 통제가 불가능한 검찰과 법원으로부터 나온다. 김학의 무죄를 선고한 대법관이 정경심 유죄를 선고했다. 정경심 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판결은 또 어떠한가. 지금은 박정희 씨조차도 추앙받는 시대인데,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검찰과 법원은 과연 존경할 만한 인물을 배출한 적이 있었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은 모두 판사나 재판장이었다. 그럼에도 ..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 전문 팬티가 떡하니 제목에 올라앉았다. 뻔한 이야기로 침 튀기지 않고 속옷 한 장으로 속내를 털어놓을 셈인가. 교통사고로 이승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뻔한 시인은 자신이 죽으면 그의 몸이 남의 손에 맡겨질 것을 아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그를 보호하던 ..
"법무부는 고 김승효 씨의 삶을 일그러뜨린 주요한 가해자였다. 김승효 씨에 대한 고문은 중앙정보부가 자행한 것이지만 검찰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모른척했다. 특히 법무부는 고문 후유증으로 조현병이 발병한 김승효 씨가 구금되어 있던 2662일 동안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은 채 방치했고, 김 씨는 결국 증세가 악화돼 영구적인 장해를 입게 됐다. 또 법무부는 끝까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며 손해배상 책임을 부인해, 고 김승효 씨가 별세할 때까지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https://newstapa.org/article/Mmhvz [변화]영화 주인공 故 김승효 유족, 손해배상 2심도 승소 [변화]영화 주인공 故 김승효 유족, 손해배상 2심도 승소 newstapa.org 나는 허우..
한 백년 진흙 속에 숨었다 나온 듯이, 게처럼 옆으로 기여가 보노니, 머언 푸른 하늘 알로 가이없는 모래밭. 정지용 다누리호가 지구를 떠난 지 145일 만에 달 곁에 안착했다. 그 탐사선은 지구로부터 약 380,000km 거리인 달까지 직진하지 못하고 리본 모양 궤도를 "게처럼 옆으로 기여"갔다. 150만 킬로미터를 우회한 끝에 "한 백년 진흙 속에 숨었다 나온"듯한 모래밭의 게처럼 "가이없는" 지구를 바라보았다. 한국은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셈이지만, 단순 유기체로 시작한 생명이 진화와 기술 진보를 거듭하며 행성의 경계를 넘는 모험을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1968년 미국의 아폴로 8호 우주인들은 달 궤도에 진입하여 최초로 달의 뒷면을 보았고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