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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깊게 듣다, 타인의 삶

레니에 2014. 1. 6. 20:59

 

<본문에는 영화 결론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위적인 제복과 평상복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신분의 위계처럼

  신체조건마저도 확연히 구분되는 두 남자,

 

영화는 이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심연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며 시작됩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자기 의무에 대한 책임감과 합리적이라 자부하는 이성으로 다져진 남자,

타자가 부여한 규칙에 완벽히 복종할 줄 아는 근면한 남자.

 

초 단위로 시간을 재며,
모호한 구석 하나 없이 정밀한 기계처럼 사는 남자.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동독의 비밀요원인 비즐러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향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국가의 안전인 것처럼

그 허무한 논리에 복종하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작은 권력에 도취한 채 살아갑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목적 아래
모든 것을 차단하고 통제하려는 조직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차단이란, 경계를 짓는 일이고 그것은 단절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기를 향한 질문을 차단함으로써

 자기 안에 또 하나의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었지요.

 

 

 

 

 

 

 

 

 

 

 

 

 

 

권력욕을 드러내는 남자와, 그 욕망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권력을 가진 남자가 만납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 앞에서는 현명한 태도를 보입니다
직관적인 지성과 실천의 용기로 자신을 포장한 채 말이죠.

 

이런 성격적 탁월성은 대개 정치인이나 권력과 금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됩니다.

 

지금 이들이'국가의 안전'이라는 추상적인 말속에, 
 어떤 의도를 감추고 있는지는 쉽게 짐작이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 현실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니까요.

 

 

 

 

 

 

 

 

 

 

 

 유명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배우인 두 사람,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억압받는 시대지만,

그들은 현재 삶의 조건이 자신들을 떠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자기 삶이 안정 속에 유지되고 점진적으로 향상된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무언가를 거래할 수 있습니다...당신은 아니라구요? 과연 그렇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타자의 욕망을 눈치챈 권력자들은 그 욕망을 미끼로 타인의 삶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타자의 방식에 맞게 서서히 길들지요.

 

외적인 것에서 부여된 권위는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항상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권력이 집요하게 집착하는 것은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일부는,

 자기 이익만을 취하고, 자기 욕망만을 돌봅니다...이렇듯.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

여전히 오류가 많고, 혼란스러우며, 모순 가득한 일들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씁쓸합니다.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연인이 선물한 넥타이를 드라이만은 자신이 매겠다고 고집을 하지만

방법을 모르던 그는,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웃집 여인에게 부탁합니다.

 

 

 두 '여성'에겐 영원한 타자인 '남성' 드라이만,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는 여인은 넥타이를 선물하고,

가장 가까운 공간으로 이웃한 여인은 그 넥타이를 매어주네요.

 

 그의 삶을 조여올 상징과 같은 넥타이를.

 

 

 

 

 

 

 

 

 

 

 

드라이만은 강요에 의해 현장에서 밀려나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동료에게서 선물을 건네받습니다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란 악보인데,

내용보다는 제목과 '타자에게서 타자에게로 건네진다'는 상징성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드라이만은 이를 연주로 비즐러에게, 그리고 책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건네줍니다.

 

 

 

 

 

 

 

 

 

 

 

현실에 순응하려는 드라이만과 체제의 부조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동료 사이에서갈등이 발생합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햄릿만의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사악한 폭력이 휩쓸던 세계는 끔찍한 아이러니를 만듭니다. 


우리도 여전히 인간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수시로 고민합니다.

 

 

 

 

 

 

 

 

 

 

 

타인의 삶을 엿듣다가 
자신의 어두운 내면에 촛불 하나가 켜지고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겠지요.

 

 

 

 

 

 

 

 

 

 

영화는 암울한 공포가 지배하던 시대를 담담하게 그렸기에
이 여인의 현실적인 두려움과 선택을 이해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목숨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고자 할 것이고,

화려한 생활에 대한 욕망을 지녔을 겁니다

 

그들의 거래를 존중할 수는 없지만, 그 본능과 딜레마와 선택은 이해합니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비즐러.

 

 타자의 모든 것을 알아도,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변할 지는 모릅니다.

 

 

 

 

 

 

 

 

 

 

장관과 은밀한 거래를 한 여인은 귀가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웅크립니다.

  몸은 씻어지지만, 마음은 씻기지가 않기 때문이겠지요..

 

 

 자기 몸을 점유하고 있는 정신이,
어떤 정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그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 삶이 온전히 자기 것일까요.

 

 

어쩌면

사랑이 어려운 것도,
인생과 나의 관계가 어려운 것도,
우리가 끝내 타자와 타자로만 남는 이유도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대답을 요구하기 때문일 겁니다.

 

 

 

 

 

 

 

 

 

비즐러가 도청하던 드라이만의 집에서 책을 가져와 읽는 장면인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썼던 브레히트의 삶이 연상되어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습니다

 

극중에서 비슬러가 읽던 브레히트 시엔 이런 대목이 있지요.

 

'사랑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너는 나에게 묻는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나는 너에게 말하겠다.'

 

 

누군가 나에게도 "너의 무엇은 어떻게 되었느냐?" 고 물을 것 같습니다

 

억지스럽게 '양심'같은 말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나는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답할 것 같군요.

 

 

 여백이 있는 도화지에만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지요.
이미 충분하다 확신하는 사람에겐 더 이상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비즐러의 마음엔 어떤 여백과

언제든 가능했던 자신을 향한 질문 하나가 있었을 겁니다.

 

 

 

 

 

 

 

 

 

 

 

 

인간이 예술과 무관하지 않을 때 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는 걸까요.

드라이만은 동료의 자살 소식을 듣고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를 연주합니다.

그 음악을 도청하며 눈물을 흘리는 비즐러.

 

프랑케슈타인의 가슴에도

 활화산 같은 뜨거움과 빙산 같은 차가움이 공존했었지요.

 

그는 지금 24시간의 완벽한 도청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
 타자의 삶에, 그리고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즐러가 임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를 만납니다.

 

"다른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말이 맞느냐?" 는 아이의 물음에

그는 습관처럼 아이의 부모 이름을 묻는 자신을 발견하고 주춤합니다.

 

그리고는 멋쩍은 나머지 아이가 들고 있는 공의 이름이 뭐냐고 묻지요.

아이는 "공에게 무슨 이름이 있냐"고 답합니다.

 

 맞습니다.

공은 공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던져지고 차이는 공에게

 다른 이름이 있을리는 없지요.

 

엘리베이터 공간 만큼이나 폐쇄적이었던

비즐러의 내면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비즐러가 카페에서 갈등하는 크리스타를 만나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전 당신을 알아요."

"난 당신의 관객입니다."

 

감시자인 자신의 신분이 무언의 지지자로 바뀌었음을 암시하는 대목 같습니다. 

 아울러 이런 말도 덧붙이지요.

 

"당신 자체가 예술인데 당신을 팔아서 예술을 사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나 모면할 수 없는 모욕이 이미 그녀를 덮쳤습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희망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무방비 상태에서 도청 당하고 기록되듯이, 영화는 그 사실을 차분하게 기록합니다.

 

 

 

 

 

 

 

 

 

 

 

 

드라이만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던 동료가 자살을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드라이만의 삶도 큰 변화를 맞습니다

 

 

사람은 고난 속에서 자기를 견딥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버릴 수 없을 때, '자신'을 버립니다.

그게 자살이지요.

 

자살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자살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과연 신의 섭리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너무 값싼 위로와 너무 쉬운 판단,

너무 쉬운 망각을 하는 건 아닌지도
묻고 싶네요.

 

 

 

 

 

 

 

 

 

 

 

 

 

자신의 행위로 발생하는 일들이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비즐러가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충성했던 조직과 국가의 어두운 이면을 확인하게 되지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들이 몰랐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비즐러는 깨닫습니다.

 

 

 

 

 

 

 

 

동독이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를 서독 잡지에 폭로하는 드라이만.

 

정보 당국의 추적을 피하고자 비밀스럽게 작업하지만,

비즐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요.

 

 

 

 

 

 

 

 

 

 

 

 

 

  취조실 장면 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타자로 남는다면 그것은
비슷한 기쁨을 공유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똑같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공감 능력의 부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채, 정신적 신체적 고문을 가하는 것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로 내몰 정보를 제공하고 풀려나는 크리스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하는지 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에 앞서 부끄러움을 압니다.

 

 

 

 

 

 

 

 

 

 

동서독이 통일된 이후에야,

드라이만은 자신의 집도 도청당했음을 알게 되고,

크리스타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지켜준 또 다른 존재가 있었음을 알게 되지요.

 

 

 

 

 

 

 

 

 

 

 

 

한직으로 밀려난 이후

평범한 우편물 배달부로 살아가는 비즐러,

 

고단한 현실이지만,
그는 이제 누구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삶에서 우리가 선취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정신의 자유겠지요, 락고 쓰고 싶지만 막상 당사가가 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다만 먹고사니즘에 떠밀려 갖은 불명예를 떠안더라도,

그런 삶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안목은 지켜야겠습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드라이만의 책광고를 보게 되는 비즐러의 모습입니다.

 

 

 

 

 

 

 

 

 

 

 

영화를 따라 호흡하다 보면 코끝 찡한 순간이 있는데

 이 장면이 그랬습니다.

 

 

그 책엔 이런 헌사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HGW XX/7에게."

 

 HGW XX/7 은 비즐리의 코드명이지요.

 

드라이만은 비즐러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만남보다는 책을 통해 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도 영웅 아닌 누구나의 삶에게,

소박한 헌사를 쓰고 싶네요.

우리의 안전과 자유도 불특정 다수가 희생한 결과이니까요.

 

 

 

 

 

 

 

 

 

 

책 포장을 원하느냐는 종업원의 질문에 비즐러는

"아니요, 그건 나를 위한 것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그렇지요.

자서전도 아닌데 미사여구를 동원한 포장도,

 그럴듯한 선물 같은 포장도 필요치 않지요.

 

그리고 지난날의 행위도 드라이만이나 크리스타를 위한 것이 아닌

결국 자기 삶에 대한 예의였다는 걸 그는 알았을 겁니다.

 

영화는 이렇듯 우리의 흔한 기대와 달리
  어떤 보상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협소한 내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질문 하나를 던져 놓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타자를 만나고
어떤 경우엔 선의를, 또 어떤 경우엔 적의를 드러내곤 합니다.

 

냉엄한 현실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인간의, 인간성으로 품을 수 없음을 일러줍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기와 다른 이질성 앞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 현실에서 이타적 본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자아라는 완고한 일차적 성질이 변환된 이후에나 가능한 난제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엔 비즐러 같은 사람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굳이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그럴듯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의 기억만큼은 서둘러 망각으로 향하지 않고,
 비즐러와, 비즐러 같았던 사람들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드라이만의 경우처럼

우리 삶 또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변화되고 있으니까요.

 

  ⓒ 박대홍

 

 

 

 

비즐러란 배역은 오직 그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절제된 내면 연기를 보여줬던 "울리히 뮈헤"는

  영화 개봉 1년 후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 포스티노에서 우편배달부인 마리오 역을 맡아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던 "마시모 트로이시"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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