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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는 서 있어야 해, 챔피언의 펀치를 견디며. 사각의 링은 사사로운 핑계 없이 한 사람이 상대가 아닌 그 자신과 먼저 싸우는 곳이야. 행운의 펀치도 자세를 추스려 상대를 향해 한 발 다가설 때 가능한 것이지. 언제나 죄를 짓는 쪽은 변명이었지 실패가 아니었어. 후회는 패배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다리 풀린 너를 다시 괴롭힐 거야. 15회만 버티면 돼. 다행히도 그러면 끝나...록키처럼."
비로소 도착했다. 뉴허라이즌스호가 명왕성을 탐사한 테이터가 지구로 전송되는 데는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전파(電波)가 전파(傳播)되는 속도를 고려하면 그 거리가 아득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가로놓인 열악한 환경과 거리에도 불구하고 탐사선과 지구는 정확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 우주 저편에 비하면 심각한 방해물 하나 없는 동일한 세상에 있지만 진심이란 전파는 전진할 수 없어 전파되지 않고 반대쪽 진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이에 카톡 1이 사라지는 시간이 때로 명왕성보다 멀다.
길에는 그를 눕히려는 은밀한 심술이 가득 누워있는데, 벤츠 옆을 지나는 삼천리 자전거 제 앞가림한다. 어떤 희망을 싣고 있는지, 내가 모르는 곳에 당신의 희망은 따로 있는 것인지 빈약한 수단으로 위험을 방어하며 나아간다. 누군가는 삶의 중심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그 무대에 끝내 다다를 수 없을 테지만 각별히 조심하여 당신은 끝내 다치지 마시라. 한 번 넘어져 생긴 어떤 상처는 겉으론 멀쩡하지만 끝내 속병이 되기도 하고, 세상은 쓰러져 실패한 듯 보이는 자들에겐 동정심이 많지가 않으니. 구시렁 ⓒ 박대홍
1은 2진법 논리가 적용된 세상에서 절반의 규모를 차지하는 수다. 1을 1에 곱하면 1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수에 1을 곱하면 1이 아닌 그 수 자신이 된다. 1 다음으로 큰 자유수는 2다. 개별적 존재 1이 대립면을 경험할 때 만나게 되는 2는 첫 번째 소수이자 유일한 짝수다. 합성수 중에서 처음으로 모든 약수가 홀수뿐인 수는 9다. 9는 한 자리로 쓸 수 있는 가장 큰 수다. 10처럼 다른 것과 묶이지 않은 채 한 자리로 쓸 수 있는 마지막 수,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임을 승인하는 최후의 수다. 살아있는 것들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빈방에 돌아와 홀로 눕는 일처럼 그만 저를 놓고 싶은 심사에도 불구하고 숫자 하나 더하듯 이유 하나 덧붙여 살고자 하는 지점.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열어두려는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