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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한남동 본문

잡담 or 한담

한남동

레니에 2020. 11. 14. 09:47

1.

유럽에 가면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우뚝 솟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저만 잘났다고 툭 튀어나온 것도 같은 성당 첨탑을 흔하게 보았다.

크로아티아의 '로빈(RovinJ)' 같은 경우도 그러한데 

시간이 차곡차곡 축적된 듯한 풍경은 여행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2.

서울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한남대교를 강북 방면으로 걸어 건너다보면 왼편으로 한남 뉴타운 3구역이 보인다.

여기가 과연 서울인가 싶은 그 동네는 불특정 다수의 가난이 봄 산 진달래처럼 혼전만전 피어났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 없는 가난이 모여 살고 교회와 이슬람 사원이 마을을 이뤘는데, 
최근 재개발 시공사가 선정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다.

 

 

 

3.

골목길은 갈피 없고 사방 경사가 가파르다.

저리 헐거운 건물로 이 사나운 서울살이를 어찌 버텼을까.
나는 걸으며 가난을 읽는다.

 

날이 어두워지면 어딘가 스며들어

간신히 발 씻고 쪼그려 앉아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을 밥 한 끼.

허름한 저것들이 다 헐리면 부자 되려 골몰한 그 허기도 사라질까?

 

뭐니 뭐니 해도 사람된 보람이야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인데,

밥이 똥이 되는 일을 수만 번 반복한 세월 동안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수확했는지 궁금해도
사람도 풍경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4.

가난이 달과 가깝게 솟아오르는
달동네는 사실 게으름뱅이가 살기 힘든 곳이다.
골골대는 저질 체력으로 산비탈을 몇 번 오르내리면 숨쉬기도 귀찮을 것 같다.

달이 가까워도 저물어 돌아온 집에서 그 달이 좋아 뜬눈으로 밤을 새는 낭만은

눈곱만치도 없이 지쳐 쓰러져 잠들기 바빴을 동네.
고개 들 힘조차 다 소진한 귀가에 달구경은 무슨.

한 사람의 성공은 환경, 노력, 운 등이 복합 작용한 결과다.

실패에도 여러 요인이 한데 뒤섞여 있다.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말, 참 생각 없는 말이다.

 

 

 

5.

돈 놓고 돈 먹기인 노른자위 재개발 시장에 뭉칫돈이 오가고

그 자본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약점을 돈의 힘으로 보기 좋게 극복할 것이다.

 

비웃음을 사던 동네는 머잖아 부러움을 사는 동네로 탈바꿈하여

가장자리가 아닌 중심이 될 테지.

 

이곳을 투자처 삼은 이들이 꼭대기부터 아래로 굴린 돈 뭉치는

굴리다보면 점차 큰 덩어리로 변하는 눈덩이가 되겠지.

계층 간 분리 장벽은 더욱 높고 공고해질 테지.





 

 

 

6.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
서울은 숲에서 잡목 솎아내듯 옛것을 정리한다.

가난은 세상 어떤 것의 대안이 아니고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생활에 찌든 이의 마음엔 열정이나 숭고한 정신이 깃들기 힘들지.
어제도 오늘도, 내일과 더 먼 내일에도 가난은 다만 무참하고 무용하고 무위할 거야.
옛것도 좋지만 우리 시대엔 우리 시대의 건축이 필요하고.

"아무리 그래도 까치밥이라도 좀 남기지..."




7.

기별 없이 동백꽃 어느 날 툭 목을 꺽듯 삽시간에 헐릴 흔적들.
우리 어쩌자고 서울로 올라와 기운이 다 빠지도록 유난하게 억척스러웠나.

참 까마득한 기억이 쏟아지는데
그만 서운하자, 그만 섭섭하자며
떠나는 것들과 작별하고 번듯한 동네로 나와 어여쁜 가게를 만나니

세상은 구김살 하나 없이 환하고 기쁨이 밀물처럼 쏴아아 밀려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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