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관리 메뉴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2월, 슴슴한 국물처럼 누긋하다 본문

잡담 or 한담

12월, 슴슴한 국물처럼 누긋하다

레니에 2020. 12. 17. 23:28

1.

코로나 덕분에 12월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각자의 피치 못할 사정에도 시간만큼은 흐지부지 흘렀다.

 

며칠 전 새벽에는 눈이 왔고,
나는 어둠 속에서 커피머신으로 한때의 잔상을 녹여 사진이나 글로 추출하듯
에스프레소 두 번, 룽고를 한 번 내려 마시며

새벽 특유의 정감에 덜미를 잡힌 채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두 번 들었다.

 

 

 

2.

한 번은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음반이었고
두 번째는 로저 노링턴의 지휘에 귀를 기울이며 어스레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악 문외한인 나는 지휘자의 자리바꿈에 따른 음악의 인상 변화를 확연하게 느꼈다.
유명 지휘자들의 해석보다 템포가 빠른 그들의 지휘가 빚은 소리는 
 귀를 거쳐 가슴속까지 흘러들었다. 

 

그 소리는 맹렬한 기세로 대양을 헤엄치는 참치처럼 질주하였고,
어느 마디에선 살아 움직이는 힘이 봄 되면 파릇한 새싹 불쑥 고개 내밀듯 돋아나다가 

다른 대목에선 슴슴한 국물처럼 누긋하였다.



 

3.

가락은 늘어지거나 가라앉지 않았다.

인생이 꼭 진지한 다큐멘터리일 필요는 없다는 듯이,

비장한 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생애 전반에 널뛰는 상황의 강약과 셈여림, 순간순간의 뉘앙스와 들쭉날쭉한 감정 변화 등을

두런두런 말을 걸듯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4.

나는 음악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고
고작 어깨너머로 배운 기타로 빤한 코드 몇 개 달달 외워 튕기는 수준이지만,
그것마저도 그만둔 지가 꽤 되었지만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부지런히 털고 매만진 '운명'의 다이내믹은 

템포가 빠른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템포가 약간 느려지면 운명 교향곡이든 월광 소나타든 듣기에는 감미로워도, 
사람살이의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 온데간데없고 

들어도 들어도 마음이 개운치 않은 어정쩡한 발라드나 얄팍한 신파극으로 격하된다.

 

 

 

 

5.

살아온 날을 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새롭게 묻는 12월.

이쯤에선 지난 1년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점검하고
새 다이어리를 펼치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준비했었다.

 

나는 항상 차분함과 들뜸이 공존하는 그 관행의 실천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딴 것보다는  
내가 거울로 나를 볼 때 만나는 가끔 눈 떼꾼하고 흰머리도 많은 데다
성격도 괴팍하고 까칠한 사내와 잘 지내는 일이 뭣보다도 중요하니
그 일이나 잘하자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단단히 다짐한다.

 

 

 

 

6.

내년에도 나는 날마다 다른 옷을 골라 입으며 

벌거벗을 때 드러나는 단점은 감추고 
애써 장점을 드러내듯 어떤 거짓말과 긍정과 값싼 위로로 나를 꾸미며 살겠지.

집 치장에도 공을 들이겠지.

환경 변화에 몸빛깔을 자유롭게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주위를 경계하고 자신을 위장하는 생물로서, 
어느 무대에서 어떤 의상과 태도를 입어야 하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리며 

가끔은 마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연기를 능숙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살겠지.

그러는 사이 늘 어떤 결단을 요구하던 인생은 이전보다 한층 난이도를 높인

새로운 문제지를 들이밀겠지.

 




7.

고향에 갔더니 반갑게 맞아주던 조부모는 선영에 묻혀있고
아버지도 그 옆에 누워있었다.

 

이따금 보던 사람들과 집의 겉깃은 오래 입은 옷처럼 낡았다.

나를 만나면 곱실 인사를 하던 아이는 아이를 낳았고,

나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꼬리 치며 진심을 신나게 드러내던 백구에 대한 기억도 이젠 희미하였다.

 

아니 그것들의 실체와 화양연화가 완벽하게 사라지고

편집 가능한 기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살피는 인생 경로는 의외로 간소하고 단조롭다.

고향은 해거름에 돌아온 집처럼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한해의 오지 12월같이 슬쩍 쓸쓸하다.

 

그러하나 나는 또 내년에도 변화를 도모할 테지.

어느 시기, 어떤 형식에 갇히지 않은 채 하다못해 설거지라도 보다 더 나은 방식을 궁리하겠지.

 

 

 

 

'잡담 or 한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뭇거리지 않는 살의  (0) 2020.12.24
갓 튀겨낸 튀김 같이 바삭한 새벽  (0) 2020.12.20
동대구역에서의 혼잣말  (0) 2020.11.18
한남동  (0) 2020.11.14
발끝 살며시 아껴 걷는 11월  (0) 2020.11.0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