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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어떤 부름 - 문태준 본문

합의된 공감

어떤 부름 - 문태준

레니에 2017. 9. 22. 13:59

 

 

 

늙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밥 먹자, 하신다

 

오늘은 그 말씀의 넓고 평평한 잎사귀를 푸른 벌레처럼

 

다 기어가고 싶다.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 같은 말씀

 

원뢰(遠雷) 같은 부름

 

나는 기도를 올렸다,

 

모든 부름을 잃고 잊어도

 

이 하나는 저녁에 남겨달라고

 

옛 성 같은 어머니가

 

내딛는 소리로

 

밥 먹자, 하신다

 

 

 

문태준 시집 『먼 곳』중 <어떤 부름> 전문.

 

 

 

 

 

 

 

 

 

 

 

 

 

소설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옛·날·과·똑·같·은·모·습·으·로…'

 

그랬다, 옛날을 알아볼 정도로 살아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라는 시구.

복잡한 것 같아도 실은 너무 빤해 씁쓸한 일.

 

이미 그것을 아는 여인이 입맛 없는 아들에게

몇 숟가락이라도 뜨자고 한다.

 

이렇게 하찮은 것이

실은 숭고한 거라고.

 

이성이 감정보다 항상 우월하지는 않으며,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하고

고상한 말이 일상의 언어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은 모두 오해라며,

나물 다듬듯 말을 다듬어 되풀이한다.

 

밥 먹자.

 

내게 있는 것으로 밥했다, 

밥 먹자.

 

 

 

사는 일은 안갯속이다.

숱한 것들이 잠겨 있는 축축하고 갑갑한 무진(霧津)에서

안개처럼 떠다니는 여행 같다.

 

세상의 흔하디흔한 사랑에 저항하며 살다가도

가끔은, 말없이 차려준 밥상의 따스한 습기에 못 이기는 척 투항하고 싶다.

 

돼먹지 않은 생의 상념과

사는 일이 너무 뻔해 눈물 나게 시시하다는 입에 고인 투정은 꾹 다물고,

몸뚱이가 또 저지르는 허기를 얌전하게 달래고 싶다.

 

뜰 앞의 잣나무.

 어쨌든 우리, 밥이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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