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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빈 화분 - 김정용 본문

합의된 공감

빈 화분 - 김정용

레니에 2017. 10. 12. 21:59

 

 

 

 

 

 

베란다에 빈 화분이 하나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

어린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묻자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빈 화분

그동안 실어 나른 목숨이 몇이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면 나를 옮겨 담은 화분도 아득하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

가족, 학교, 군대, 사랑, 일터, 오 대~한민국!

결국엔 우리 모두 지구 위에 심어졌다는 생각

 

목숨 붙은 걸 함부로 맡는 법 아니라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겁도 없이 생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는지

 

빈 화분

그 오랜 공명이 아직

씨 뿌리지 못한

빈 몸을 울리고 지나간다

 

어찌하여 화분은

화분이 되었는지

 

 

김정용 시집 『메롱메롱 은주』에서

 

 

 

 

 

 

 

 

 

 

 

얼마 전에 함께 사는 반려식물이 

생기를 잃은 잎 두 개를 내가 놀라지 않게 가만히 내려놓았다.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엉뚱한 곳으로 팔을 내밀며 크던 녀석이라 

몇 년동안 눈여겨보았는데 안타까웠다.

마치 남의 여자가 된 옛 애인을 만난 것처럼 착잡했다.

 

 

무언가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것이 뿌리내릴 장소가 화분보다 좁은 내 알량한 품이란 걸 자각하고선 

시답잖은 그 바람을 단념하곤 했었다.

 

뭔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실은 그것을 내 방식대로 다스리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인간과 소나무 중에

제 의지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고통은 어느 쪽이 더 컸을까.

 

 

참고 견뎌야 하는 화분의 세계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저마다 자기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비본연적 삶을 강요받는 화분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분갈이할 때 드러나는 뿌리의 발버둥은

무언가에 자리매김하는 일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잘생기게 만든 일품 소나무와 달리 남자는 대다수의 원망을 받는 대상이었다.

한때 사람들은 합심해서 그를 화분보다 좁은 궁지에 내몰았다.

 

더 나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헌신으로 일관해 온 삶이 곡해되는 고통은 얼마쯤 감내하더라도,

길을 가다 넘어져도 '이게 다 노무현 탓'이라는 말이 사방에서 쏟아질 때

예외없이 한낱 사람일 뿐인 그는 얼마나 갑갑했을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에서는

작품에 깊이가 없다, 는 논평으로 재능이 뛰어난 화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관성 없는 평론가가

그녀의 죽음 후 자신의 견해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데 나 또한 그처럼 무지하고 모질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이런 강제성.

 

"나무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가지가 어느 방향으로 몇 개가 뻗어야 하는지,

몸은 얼마나 굽어야 보기에 좋은지,

얼마 정도가 맞춤한 키인지는 우리가 정할게.

 

혹여 네가 딴 데를 바라보면 곤란해.

그래 봤자 가지를 치면 되지만 괜히 귀찮게 하지는 마.

그건 화분의 윤리와 생태학적 균형을 해치는 일이야.

 

사회적 규범과 조화라는 정상 범위는 네가 아니라 우리가 정해.

 

그러니까

유난 떨지 말고

제발 좀 가만히 있어.

그래야 살아남는다 너.

 

기껏 키워놨더니 뭐하는 거니 지금!"

 

 

 

 

 

 

사랑한 대가를 너무 크게 치르는 이들이 문득 가엽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간 나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화분에 붙들어 놓은 식물이나 나무의

살아가는 이유까지 너무 쉽게 규정하고 간섭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내 마음껏 사랑한다는 것이

정작 상대가 마음껏 살지 못하게 한 것만 같다.

 

 

 

 

화분은 일반화된 우리를 실어나르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거칠게 비유하면 화분 목록은 주위에 수두룩하다.

 

'삼성'이라는 화분에 최적화되어 다소곳이 심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듯

금지 요구에 순응하면 화분의 세계에서는 발을 헛디딜 위험이 적어진다.

 

나는 당신에게 최적화되어야 하고

당신도 나에게 최적화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작동하는 곳이 우리 세계다.

 

누구나가 애용하는 그다지 다르지 않는 그 방식으로 서로는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는 서로를 사용하면서

어김없이 천국과 윤회라는 화분에 심어지기를 은연중 바란다.

 

철없던 아담은 금지의 요구를 거부하며

최초로 에덴동산이라는 화분에 심어지는 영광을 거부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느라 바쁘다.

 

"You can do it!, 

열심히 하면 너도 그 화분에 소속될 수 있어!"

 

 

 

 

 

 

 

 

 

 

 

 

 

 

 

 

힘껏, 무력하기

 

발터 벤야민과 고흐가 그랬듯이 위 사진 속 책의 저자들도

스스로 붙박이 삶에서 자신을 꺼내 화분의 세계를 떠났다.

다른 식물들과 나무들은 그 세계에서 잘도 살아남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마도 우리가 당위처럼 즐겨 사용하는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가장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화분의 세계는 벗어나려 했으나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의 운명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폐쇄적인 구조다.

 

말만 잘 들으면 그럭저럭 살 만한 그 세계에

나무와 식물들은 무슨 연유로 고정되었는지.

또 무슨 이유로 생략되는지.

 

왜 지역주의는 지역주의가 되었는지.

언제부터 국경은 국경이 되었는지.

어쩌다가 아줌마는 아줌마가 되고 맘충은 맘충이 되고

한남충은 한남충으로 프레임화 되었는지.

 

어째서 늘 관점은 언론의 프레임이란 화분에 갇히며 무의식은 의식에 붙들이고 마는지.

사람들은 윤리를 말하지만,

정작 그 윤리를 실천한 삶이 왜 모두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인지.

 

왜 무지와 변덕과 프로파간다는 그리도 힘이 센 것인지.

갈릴레오처럼 누구보다 일찍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토록 가혹한 것인지.

정말이지 왜 그런 서사는 영영 고착되려는 듯 한사코 반복되는지.

 

그런 생각쯤을 하면서 나는,

퉁퉁 부은 발을 화분 속에 감추고 상냥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법을 깨달은 듯한 

내 반려식물들과 세상의 나무들에게 좀더 많은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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