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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이상국 본문

합의된 공감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이상국

레니에 2017. 11. 5. 22:59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각색해

교묘히 서술자의 위치만을 높이는 시들이 많다.

 

그런 시는 식초처럼 시다.

 

어떤 시는 새로운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시다 못해 산도가 너무 높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다.

 

비판의식과 도덕 강박을 내세우는 경향도

시가 삶의 발효식품으로써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 의문이 들고 몸에 좋을 것 같지도 않다.

왜냐면 그들의 시는 과도하게 독자를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좋은 의사는 먼저 환자를 편안하게 만든다.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시인보다 앞서 시인의 어머니가 시를 썼다.

 

시인이 옛 기억을 꺼내든 방식도 소박하다.

사람들이 표출하지 못한 채 각자 품고 사는 정서가 두텁게 배어든

문장은 오래 한 사랑처럼 애틋하다.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매번 그게 그 소리인 거 같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많아

사십여 년이나 애를 썼으면서도 시로 만들지 못했다.

 

남다른 뭔가를 써보겠다던 시인이 나날이 삶의 구체성을 확인하면서 세심하게 곱씹어보니

그 말이 습관적으로 하던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모든 예술은 본능으로 동일성을 거부하지만,

세상의 서사 구조는 이전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쓰인다.

사람은 대개 무언가를 어느 정도 감내하며 살아간다.

 

나이들수록 돌아가신 부모님과 거리두기가 어렵다.

 

달은 그 달인데

그때 그 말마따나 달이 째지게 걸렸는데

정작 '달이 째지게 결렸구나' 하시던 이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잘 사시더라는 헛소문이라도 듣고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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