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물 - 이정록 본문
물
어머니학교 12
티브이 잘 나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놓으면 안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에다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겄다.
뭐가 그리 슬퍼서 울어쌓는다니?
남의집 것도 그런다니?
이정록 시집 『어머니학교』 중 <물> 전문.
잘살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기는 어머니나 나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좋은 거 먹고 싶고
좋은 거 입고 싶고
좋은 데 가고 싶고
내 자식 잘 되는 거 누구보다 바라고.
한데, 사는 건 고행길.
얼었다 녹았다 하는 진창에 빠져 신발과 양말이 젖고
발끝 얼어붙는 한기를 느낀 때가 누군들 없었을까.
그래도 어머니는
응어리 든 맘으로 누구한테 심술부리지 않고
세상에 부아 내지 않는다.
누가 목마른지,
누가 우는지
어머니는 늘 제정신이다.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는 정신없는 세상.
누가 들어도 좋은 말은 갈수록 적고
누가 들을까 겁나는 말은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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