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아버지의 욕 - 이정록 본문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아하, 욕실 바닥을 치며 웃는다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마는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소리로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디, 어디 없을까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광천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어른이라서 부지런한 게 아녀
노심초새한테 새벽잠을 다 빼앗긴 거여"
두 번이나 읽은 조간신문 밀쳐놓고 베란다 창문을 연다
술빵처럼 부푼 수국의 흰 머리칼과 운동화 끈을
비눗물방울이 잇대고 있다
이정록 시집 정말 중 <아버지의 욕> 전문
없던 살림이 별안간 나아질 리 없고,
앞날은 안심이 안 되니
비방 없고, 요령 없고, 극성 없는 당신은 새벽마다 앓아누웠을 테지만,
딸린 자식들은 자느라 바빠 상태가 어떠신지 한 번도 문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한목숨이 버티며 사는 데
'개자식'이 큰 구실이 되었으니 저는 효자입니다.
아버지.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이
재까닥 밥벌이하느라 밥에 꼬리 치는 재간을 갖춘 진짜 개자식이 되었습니다.
'개자식'을 에둘러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이라고 하셨지요.
평생 밥그릇 내던지지 못할 대물림 개 팔자가 차마 안쓰러우셨던 거지요.
생이 기우뚱하니 비로소 누가 들을까 몰래 한숨 쉬던 아버지 모양 됩니다.
못마땅하셔도
오죽했으랴, 여기십시오.
개자식, 아니 '불쌍한 내 새끼' 는 별 탈 없으니 염려 마시고
무덤에서 무덤덤하게 주무시고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