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기억할 만한 지나침 본문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중 <기억할 만한 지나침> 전문
한 남자가 내용물처럼 실내에 있다.
그의 직책은 말단 서기.
모종의 질서가 안정적으로 구축된 관공서라는 구조 속에서는 하찮은 자리다.
실내 남자는 울고, 실외에 위치한 화자는 주의를 기울일 뿐 개입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꾼다는 자명한 속내를 시인은 속깊게 엿본다.
우리는 가족, 학교, 조직, 국가등으로 형상화된 다양한 장소와 공간에 정물처럼 놓여 있다.
안 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 안 하는 현실을 사는 건 불가능하기에
누구나 몸속에 남모르는 슬픔 몇 개쯤 가졌기 마련이다.
기어이 잘살아보겠다고 독하게 생을 도모하며
하염없이 앞만 보고 전진할 때,
우리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지나침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속울음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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