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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기억할 만한 지나침 본문

합의된 공감

기억할 만한 지나침

레니에 2017. 12. 13. 09:59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중 <기억할 만한 지나침> 전문






한 남자가 내용물처럼 실내에 있다.

그의 직책은 말단 서기.

모종의 질서가 안정적으로 구축된 관공서라는 구조 속에서는 하찮은 자리다.


실내 남자는 울고, 실외에 위치한 화자는 주의를 기울일 뿐 개입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꾼다는 자명한 속내를 시인은 속깊게 엿본다.



우리는 가족, 학교, 조직, 국가등으로 형상화된 다양한 장소와 공간에 정물처럼 놓여 있다.

안 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 안 하는 현실을 사는 건 불가능하기에

누구나 몸속에 남모르는 슬픔 몇 개쯤 가졌기 마련이다.


기어이 잘살아보겠다고 독하게 생을 도모하며

하염없이 앞만 보고 전진할 때,

우리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지나침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속울음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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