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관리 메뉴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본문

합의된 공감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레니에 2018. 2. 13. 15:59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에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어지럽고 어리둥절한 시가 얼마나 많았나.

 

시인이랍시고,

문학이랍시고

권위를 몇 겹씩 껴입던 글들.

 

그런 규정과 관행을 가벼이 깨뜨려버리는 천진난만함이 너무 사랑스럽다.

 

 

시인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얘기에 나도 시인과 같은 심정이라고,

나 역시 나를 타인으로 규정한 나의 타인들에게 웃기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되면서 

그들이 영원히 모르는 영역에서 수국이 늙어가는 태도로 조용히 늙어가겠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며 사는 나를 내가 가장 먼저, 

가장 큰 웃음으로 비웃는다고 나직이 고백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