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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 - 셰이프 오브 워터 본문

합의된 공감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 - 셰이프 오브 워터

레니에 2018. 2. 22. 23:59

 

셀리 호킨스의 연기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지켜보려 극장에 갔다.

오늘 개봉한 영화의 첫 회를 선택했다.

 

 

 

 

 

 

 

 

영화의 플롯은 전형적이다.

이질적인 것과의 사랑은 '킹콩'이나 '미녀와 야수' 같은 작품을 통해 꽤 익숙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남성성이 내재한 괴생명체와 

그에게 연민하고 공감하는 아름다운 여성성이 등장해

폭력에 저항하고 치유의 역할을 하는 내러티브는 그동안 자주 변주되고 애용되었다.

 

문제는 설득력이다.

소재 선택이 촉발한 기시감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연출자의 역량이다.

 

 

 

 

 

 

 

 

 

 

 

 

영화는 마치 <캐롤>을 보는 듯 했다.

우아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와

원색에서 조금은 톤 다운된 색채로 생략된 대사를 오히려 풍부하게 표현한 화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다채롭고 세련된 기조를 시종 유지하는 것을 보는 것과

적절한 자리마다 골라 나오는 음악을 듣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버스에 탄 엘라이자의 사랑스러운 표정이 유리창 너머로 비치고 아울러 물방울이 합일되며

육체적 결합을 은유하는 장면은 매우 에로틱한 베드신과 다름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 됨이 아니라 차이의 통일이었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낱개로 분리됨을 허하는 유연성이었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사랑은

결합, 대립과 함께 분리 또한 겸허히 인정한다.

 

 

 

 

 

 

 

 

 

 

 

그동안 예수는 백인으로만 그려졌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원하는 타자의 형상은 우리와 닮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이다.

 

'신의 형상대로 빚었다"는 말에는 그와 유사한 한계성와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완고한 완력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청소부는 소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감히 여성이라는, 흑인이라는, 장애인이라는, 불온한 외국인이라는 여권을 들고

고상한 세계를 방문한 얼치기 이방인에 불과하기에

언제든 차단되고 추방되고 제거될 수 있다.

 

몹시 불합리한 일이지만,

원래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대상으로 규정된 세계에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결핍보다는 그녀가 욕망하는 현자임을 오프닝부터 보여준다.

"사랑해"라고 가볍게 남발하는 언어가 거세된 세계에서도
그녀의 베드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 속 깊은 층을 거침없이 유영한다.

 

 

 

 

 

 

 

 

그 반면에 스트릭랜드의 성행위는 협소한 침대에서 편협한 인간동물이 벌이는 배설로 그의미가 축소된다.

그이의 사랑도 열정적이고 저돌적이지만,
일상적 위계가 설정된 전형적인 체위에 불과하다.

 

 식탁 위에 정갈한 밥상을 차릴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왜곡된 사랑의 형태는 다만 측은하다.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당신이 ~ 하지 않는다면" 혹은 "당신이 ~을 해준다면" 이라는

전제 조건을 내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생활에 예속된 온갖 방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떤 조건하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떤 조건하에서만 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자유롭지도 선하지도 않을 것이다.

 

 

영화의 부제인 '사랑의 모양'은 사랑의 양태에 대한 질문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사랑은 주체와 대상에 따라 그 생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모든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합리성만이 아니라

감성과 상상력을 동원하는 능력까지를 포함한다.

 

우리의 합리적 이성과 연민할 줄 아는 능력과 사랑할 줄 아는 권능이

'권력'을 가까스로 뛰어넘고, '차이'를 간신히 극복하고,

'돈'을 겨우겨우 초월하고, '편협'을 가뿐히 건너뛰어

서로에 대한 혐오를 혐오할 수 있을까?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온갖 방해들 앞에서 

"사랑은 사랑이다"라고,

"사랑이 사랑이다"라고 힘있게 외칠 수 있을까?

 

이 감상을 쓰는 짧은 시간에도 꼭 그래야만 하느냐는 반문이 즉각 고개를 들고

그 반문에 다시 반응하는 일이 내 속에서 반복된다.

 

살다 보니 이런 민망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지만

이런 대답도 아직은 가능하다.

 

사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선행된 사랑의 결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한다.

사랑이 아무리 우리 삶에서 뒷전으로 밀리고 있어도,

쓸모없어 보이는 무정형성에 대한 사랑이 어떤 형상을 빚어낼지는 

사랑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정녕 모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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