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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토지> 기화의 독백 본문

합의된 공감

<토지> 기화의 독백

레니에 2018. 4. 2. 23:14


'나는 누굴 위해 비단옷을 입었나.

내 가장 내 자식 등을 덮기 위한 길쌈이라면 주양장천 긴긴 밤도 길지 않을 것을.'



세월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지나간다.

사람들, 흘러가버린 사람들, 남아 있는 사람이 지나간다.

무리를 지어가는 얼굴들, 그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지나간다.


외롭게 홀로 가는 사내 구천의 얼굴도 지나간다.

그 들판, 그 강물, 얼음 녹은 강물 소리, 떼지어 앉은 보리밭의 까마귀들이 지나간다.


(…)


기화는 어느덧 자신이 지난 역사의 운행(運行) 속을 흐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피의 운행이요 남의 피인 동시 자신의 피,

서희가 간도로 떠난 후 오 년간은 망실의 폐쇄의 세월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동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다시 서울로 격변한 생활의 오 년간은 해 저문 날 낯선 길손이

휘적휘적 걸어가던 세월임이 분명하다.


과거에 걸어놓은 고리가 오늘 이 손때 묻은 베틀 위에서 처음으로 연결되고,

과거를 운행하던 피는 비로소 지금 이 자리에서 이어져 흐르고 망실된 오 년간,

안개처럼 침침하며 까마득하며 떠나버린 밤배처럼 자취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한데 이 격렬함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이 안쓰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밑바닥에서부터 거슬러 오르는 삭막한 바람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아아 또 이 한은 어디서 연유되어

맺힌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기화는 알지 못한다.



<토지 2부 3권 중에서>








길상이를 사랑하던 봉순은 기생 기화가 되었다.


그녀에겐 최서희가 가진 분노, 집념, 욕망, 증오, 아집이 없다.

또한 서희처럼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하지도 못한다.


서희가 삶을 두 시간짜리 영화처럼 산다면 봉순은 30초짜리 광고처럼 살아간다.


길상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나듯 서희는 삶을 만들었고 봉순이는 받아들였다.


우리는 누구나 당차고 품위를 잃지 않는 서희의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길 원하지만

가끔, 아니 자주 봉순의 처지가 되어 회한에 젖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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