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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토지> 봉순이 본문

합의된 공감

<토지> 봉순이

레니에 2018. 4. 12. 10:59

 

 

최초엔 길상을 잃었고, 다음엔 상현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린 기화는 또 버림받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잃었고, 마지막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망각한 것이다.

도망은 상실과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일까.

 

(…)

 

"봉순아! 니 어디 갈라꼬 여기 또 왔노!"

 

<토지 3부 3권 중>

 

 

 

 

 

 

 

 

 

 

 

 

 

길상과의 이별이 봉순에게는 중심의 상실이었는지 모른다.

 

전참봉, 서의돈, 그 외 어정쩡하게 맺은 무의미한 인연들.

중심에서 멀어진 순간부터 어쩌면 봉순에게 삶은 잡다한 것이 되어버렸다.

 

 

서희는 아편에까지 손을 대 피폐해진 봉순이를 평사리로 돌아가도록 배려한다.

용정에서의 싸늘한 만남과는 달리 서희는 그녀를 가련히 여긴다.

서희는 길상이 투옥된 충격 속에서도 봉순과 그녀의 딸을 거두지만

봉순은 이미 인생을 지속하려는 힘과 방향성과 균형감을 상실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듯이,

사람이 자기감정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끌려간다.

 

 

서희는 봉순에게 말한다.

"나는 옛날 일을 잊어야겠지만 자네는 더러 옛일을 생각하게."

 

그러나 평사리는 봉순이가 제 어미처럼 종이 되어 얽매였던 곳이다.

그녀가 상전에게 매여 살던 어릴 적 평사리는 주인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운명의 불합리에 맞서 싸우기 힘들던 기억이 가슴 깊이 새겨진 곳이었다.

 

봉순이가 사랑하던 길상도 결국 주인이 차지했다.

봉순이에게 평사리는 추억과 함께 

부자유와 억압이라는 현실이 들락날락 자맥질하는 곳이어서

 그녀에게도 그곳은 잊을 수 있다면 잊고 싶은,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뼈아픔이었을 것이다.

 

봉순은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를 갈망했으나

오히려 자기 내부의 무기력에 포획되어 무책임한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집 나온 봉순에게 밥을 먹이고 설득해서 평사리로 데려다준다.

봉순이 살려면 갈 데는 평사리밖에 없다고 믿는 그 다정한 인심마저 봉순의 진실과는 너무 다른 이율배반. 

나는 자꾸 그게 삶이라 여겨진다.

 

봉순도 공월선처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사랑받지 못했다.

목청 높이며 온몸으로 이용의 사랑을 갈구했던 강청댁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서희도 마찬가지.

 

탈출하듯 몰래 평사리를 벗어난 봉순을 마주친 붙박이 하인 신세 억쇠가 묻는다.

 

"봉순아! 니 어디 갈라꼬 여기 또 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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