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토지> 주갑의 말 본문
"서러운 사램이 많으면 위로를 받은께.
나보담도 서런 사램이 많은께 세상을 좀 고맙기 생각허게도 되제요.
조선에 남았이면 그 더런 놈의 왜놈우 새끼 똥닦개나 됐일 것이오.
누가 뭐라 뭐라 혀도 여기 온 사람들, 나쁜 놈보담이사 좋은 사람이 많질 않더라고?
이 주갑이야 본시부터 사람도 재물도 없는 혈혈단신, 잃을 것이 개뿔이나 있었간디?
사람 잃고 재물 내버리감시로 설한풍 모진 바람 마시가며 내 동포 내 나라 생각허고
마지막 늙은 목숨 바친 어른들 생각허면...... 목이 메어 강가에서 울 적에 별도 크고오
물살 소리도 크고 아하아 내가 살아 있었고나, 목이 메이면 메일수록 뼈다귀에 사무치는 설움,
그런 것이 있인께 사는 것이 소중허게 생각되더라 그 말 아니더라고?"
<토지 3부 4권 중>
그 남자에겐 염치가 있다.
강단 있고, 자유 있고, 줏대 있고, 자존감 있고, 눈치 있고, 의리도 있다.
큰소리쳐야 할 때 큰소리 칠 줄 알며
울어야 할 때 크게 울 줄 알아 눈물도 많다.
다만 주갑이에겐 힘 있는 나라와 돈은 없다.
남모르게 연모했던 봉순이도 이제는 가고 없다.
그 역시 양립불가능한 삶의 조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셈이다.
모든 씨앗이 토지에서 자리매김하는 일이 어찌 쉬웠을까.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하느라 바쁜 세상.
잘 살기 위한 몸부림이 치열한 세상.
주갑은 살길을 찾아가는 씨앗을 연민하는 마음을 추슬러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낸다.
<토지>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전라도 사투리는 작가가 그를 남다른 애정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웃을 일 없던 <토지>는 12권에 이르러서야 잠시 주갑이 덕분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