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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새해 소망은 본문

잡담 or 한담

새해 소망은

레니에 2020. 12. 31. 22:19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오규원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중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전문 


 

 

 

1.

온갖 이야기들이 모여 내 이불속으로 쑤욱 기어들어 오는 밤이 있다.

그들이 꼼지락거리고,

흐뭇하게 웃고 떠들다
문득 얼굴이 찌푸려지는 희미한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리면 낯이 뜨겁다.


 

 

 

2.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가.

돈 몇 푼에 치사해지고,

팔은 안으로 굽고, 힘 있는 자에게 비굴한 얼굴이 되기 일쑤다.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욕망의 관성에 따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려 한다.
소심할 뿐인 성격을 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무책임함을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며, 무관심을 배려로, 간섭을 친절로 기만한다."

 

↑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중에서


 

 

 

3.

책 속 어느 문장 혹은 타인의 눈빛에서 나와 비슷한 불안을 읽어내고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는 때가 있는데,
살아 있는 목숨은 너나없이 무슨 벌을 받듯 불안에 떨며 사는구나, 싶어서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향된 인간이다.
내게 와닿는 음악을 골라 듣듯 말과 글 또한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가려낸다.

그런 태도를 탓하는 이도 있겠지만, 너무 손가락질하지 말기를.
그것도 다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일 테니.


 

 

4.

살다 보면 자기 검열, 자기 객관화가 지나친 나머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기 힘든 때를 만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듯 자기 자신도 용서해야 무난히 살아가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며 부지불식간에 고개 들어 자문자답하는 때도 있다.

그때마다 한심스러워 견딜 수 없는 자기부정과 한편으론 대견하게 여기는 자기인정을 반복한다.

 

 

 

 

5.

나는 지난 1년 동안 집단과 개인의 속이 빤히 보이는 민낯을 자주 보았다.
검찰과 법원, 언론과 몇몇 논객들이 거리낌 없이 내보인 민얼굴은

뻔뻔할 권리를 독점한 듯 거침이 없어서 지켜보는 속이 아니꼬웠다.

나의 치사함과 변덕스러움도 그처럼 고약할 것이다.

 

 

 

 

 

6.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에 처한 소상공인의 고충을 다룬 뉴스에서

텅 빈 가게를 지키던 주인이 인터뷰 도중 설움이 복받치듯 울음을 터뜨렸다.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에서 동사하였다.

 

기억에 남을 2020년.

나는 무사하여서 한해의 마지막 날에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충과 슬픔은 어디에나 있다고 한가롭게 끄적이며

송창식 씨의 '잊읍시다'를 듣는다.

 

 

 

 

7.

잘 가라, 2020년.

뭐라도 해보려 캄캄한 새벽에 길을 나선 사람이

다저녁에 밥도 못 먹고 빈손으로 돌아온 꼴이 영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그의 사소한 사정과 용기와 수고를 욕되게 하는 짓은 삼가련다.

 

모쪼록 시간이 그의 지향과 그가 꿈꾼 세계가 허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길 바란다.

 

더도 덜도 없이 이전의 정상성을 되찾고 싶다.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든 하나님이나 개혁이 아니라 마스크 없이 모여서 웃고 떠들던 나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자유를

예사롭게 반복하던 그 일상성을 어서 회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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