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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모퉁이에서 바라보는 정면(正面)과 이면(裏面), 영화 "스모크" 본문

합의된 공감

모퉁이에서 바라보는 정면(正面)과 이면(裏面), 영화 "스모크"

레니에 2021. 5. 13. 12:45

 

드물게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난주에 본 <스모크> 같은 영화가 그렇다.

영화 <스모크>는 도입부부터 나를 홀리고 꼬시다가 몸이 풀리면 빌드업을 하고 

마침내 역전골 같은 펀치 라인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빽빽한 여백을 선명하게 적어놓은 시처럼 자유로운 상상을 부추겼다.

 

그런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휘발되지 않은 채 마음에서 살아 숨을 쉰다.

 

 

 

뭐랄까, 곤히 잠든 강아지의 다스운 체온과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데 

강아지가 슬그머니 몸을 쭉 펴며 기지개 켤 때 느끼는 기쁨 같고,

건조기에서 막 나온 빨래에 남은 따스한 온기 같았다.

 

 

 

 


'오기'는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조막만한 자기 가게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는 그 일을 별 회의 없이 계속한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쳐버린 것들이 죄다 들어 있다.

앨범 속 사진 어디에도 그 남자의 가게는 그대로 선명하게 있지만 사람 대부분은

불쑥 튀어나왔다가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스모크"는 우리가 들이쉬고, 머금고 내쉰 우연과 순간, 진실과 거짓의 희미한 형태를 톺아본다.

돌아보니 온데간데없는.

 

사진 찍는 사람을 보는데 '오르텅스 블루'의 시 <사막>이 생각났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기는 시간의 모퉁이에서 시간의 뒤를 본다.

아무것도 아닌 세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주문을 외거나

멍하게 스친 낯선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엄숙한 의식(儀式)처럼.

 

 

 

 

 

 

꽃 진 자리엔 추억이 대신 나뭇가지에 싹이 돋듯 피어나고

철새들은 머물던 곳을 떠난다.

 

사람살이도 변화이거나 적응이거나, 타협이거나 용서나 화해이거나 혹은 그 밖의 무엇일 테지.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도 헛헛한 속으로 피우는 담배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곤 하는데

그래서 나는 이따금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한다.

"나는 지금 누구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그러고 나서 어쩌다 나온 말 황급히 거두며 곧바로 인정하지.

나 지금 야트막하고 납작한 꿈조차 꾸지 않더라도,

머잖아 담배 연기처럼 아무 의미 없이 흩어질 삶과 인연을 그저 정성껏 계속 쌓아가면
그걸로 좋은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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