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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엄마는 추석 전날 도착하셨다. 자식은 비로소 노인이 된 엄마가 쓸 화장품을 사고, 잠옷을 샀다. 가을옷도 샀다. 스카프도 샀는데, 하나로는 영 아쉬워 하나 더 사자고 실랑이하다 그만 집으로 왔다. 엄마가 잠시 단잠에 빠지자 자식은 몰래 나가 옷 몇 개를 또 샀다. 추석날 하늘은 깨끗했다. 피곤한 엄마는 거실 바닥에서 낮잠을 주무셨다. 모로 누운 엄마의 등은 심심하고 허전했다. 다 큰 자식은 다스운 봄날 스르르 몸이 녹아 눈치코치 없이 널브러진 강아지처럼 엄마 옆에 누워 구시렁댔다. "울엄마 많이 늙으셨네." 조금 전 엄마가 떠나셨다. 운 좋게 싹이 튼 어린 것들과 뿌리를 내린 젊은 것들은 영악하게 영글고 온갖 풍상을 견딘 것들은 정직하게 시들다 맥없이 사라지려니 싶다. 나도 이제는 여행 그만 다니고 가끔..
1. 언론의 독창성은 개인의 정체성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논리와 감성을 조합한 앵커브리핑과 사안별 심층 보도는 뉴스룸만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형식이지요. 속보 경쟁보다는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품위를 유지하는 보도 방식은 손 앵커가 그동안 견지한 바탕이자, 시청자로부터 얻은 신뢰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2. 이번 앵커브리핑의 맥락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진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엇보다 '균형'이 필요하겠지요. 설령 진실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다들 각자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해 오독하고 가공할 겁니다. 그래요, 중요한 건 누군가는 장마 이후를 말해야 합니다. 해마다 오는 장마가 좀 지루했다 한들 그게 뭐 대숩니까. 3. 그동안 손 앵커님은 언론의 능력, 그러니까 '힘'을 여러 차례 입증했습니..
예전에 이산가족 상봉 관련 방송과 사진을 보면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방송과 기사가 감동을 강요하며 호들갑을 떨어도 나는 당사가가 아니어서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어요. 이산가족 상봉을 다루는 매체는 항상 남측이 북측에 훨씬 좋은 선물을 하는 뉘앙스로 끝을 맺었습니다. 북..
1. 이번 여름은 누구에게나 아마 처음일 것이다. 폭염경보는 일 최고기온이 35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하면 발효되는데 요새 하도 놀라서인지 이젠 35도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어젯밤엔 기계 도움 없이 잠을 잤다. 초저녁부터 점점 내려가기 시작한 기온은 자정쯤엔 가을날씨 같은 23도였다. 습도도 50%로 적정했다. 대기 질도 좋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상큼한 바람이 확 밀고 들어왔다. 애면글면 기다리던 가을 같아 반가웠다. 기분 좋은 심호흡을 하며 사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 싶어 온몸 세포를 다 동원하다가 한편으론 좀전의 그 열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신기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지는 인간사의 덧없음 마냥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은 매일매일 변한다. 날씨가 선선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를 ..
1. 의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응급 헬기 안은 아닐 것이다. 피와 변을 보고 만지는 수술실도 아님은 외과 기피 현상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군인에게 가장 안전한 곳도 적에게 노출되는 야전이 아님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2. 북에서 한 남자가 선을 넘어왔다. 상황에 따라 진보이거나 보수인 나는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데, 어떤 이가 넘고자 하는 선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선이었다. 일부 정치인들이 그를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때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그를 살리기 위해 군인들과 의료진의 앞뒤 가리지 않는 고투가 있었다. 3. 줄을 잘 서야 하는 건 한국사회의 금과옥조다. 주류 사회가 받아들일 경로를 밟지 않으면 인생이 순탄치 못하다. 거칠게 말하면 쪽수가 많은 쪽,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