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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1 카메라 둘러메고 재개발 예정 구역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낡은 다세대주택 외부 계단을 오르는 택배기사가 보인다. 자기 등짝보다 더 큰 짐을 지고 2층을 지나 3층으로 오르던 그가 갑자기 주저앉더니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일어나지 않는다. 몇 분이 흐른 뒤 그는 무슨 결심이라도 선 양 1층으로 내려간다. 짐 두 개 그곳에 더 있다. 그는 심한 교통 체증에 걸린 차량처럼 느리게 느리게 나머지 짐을 마저 옮긴다. 그 풍경을 흐지부지 지켜보는 나는 점심을 커피 한 잔으로 건너뛰었는데도 뭐에 체한 듯 속이 답답하다. 아무래도 아무나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쯤 건네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2 전날 주문한 통영 굴이 도착해서 굴국을 보글보글 끓였다. 갓김치 담글 때 짠맛 순화용으로 넣어둔 무 조각을 꺼내 물에 헹구..
고창 선운사에 다녀갑니다. 꽃무릇 미치도록 핀 여기 선운사, 정면 아홉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큰 누각 만세루에 앉아서 보는 대웅전과 백일홍이 끝내주지요. 감탄은 속으로만 했습니다.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이니 입은 다물고요.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치아바타를 더 맛있게 만들어 먹을까만 궁리합니다. 만세루의 서까래와 대들보, 기둥, 툇마루는 삐뚤빼뚤합니다. 목수가 수없이 만지작거렸을 하나같이 못생긴 부재들이 세상의 부자연스러운 하중을 지탱하고 무지근한 허무를 버텨냅니다.
봄을 핑계 삼아 엄마 집에 들렀다 돌아서는데, 혼자인 엄마와 엄마 집 마당서 홀로 사는 홍매화 향기가 멀리까지 따라왔다.
1. [후추] 후추는 검은 황금으로 불렸다. 향신료 후추는 천 년이 넘도록 동서양에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쌌다. 조선시대에도 후추는 대단히 귀했다. 선조 20년, 일본서 도요토미가 조선을 염탐하러 보낸 사신이 왔다. 당시 조정은 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일본 사신 다치바나가 일부러 후추를 꺼내 술좌석에 뿌려대자 벼슬아치와 기생, 악공들이 앞다퉈 후추를 줍느라 연회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를 참칭하는 정치 모리배와 언론, 벼슬아치들이 일본이 고의로 슬쩍 매운맛을 흘리기 바쁘게 엎드려 기어다닌다. 2. [중경삼림] 영화 에서 왜 그리하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데 그녀 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난 너무 소심하게 변해버렸다. 레인코트를 입을 땐 늘 선글라스를 쓴다. 언제 비가 올지 언..
1. [부산] KTX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출발한 지 채 3분이 되기 무섭게 기사는 "이 정권 당장 탄핵해야지 원!" 하며 부산스레 맞장구를 원했다. "기사님, 조용히 갑시다. 저 민주당 권리당원이에요." 그 후 그와 내 입에선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요즘 내 몸속 깊은 곳에는 세상의 막막함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견적이 빤한 상대와 입을 열어 무엇 할 것인가. 설령 서로의 입과 귀로 수많은 말이 들락거려도 우리는 영영 논리와 사실로 서로를 설득할 수 없고, 끝내는 그들 못지않은 소리가 내 입에서도 나올 텐데. 2. [변검] 윤석열 검찰은 왜 이 중차대한 시국에 신천지를 압박하지 않을까? 시민단체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지자체장이 수사를 촉구하는 데도 그들은 태연하다. 무지막지하게 표창장에 집..
알 만큼 알고 해볼 만큼 해본 나이 중년. 그래도 뜻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 변수로 인해 인생이 좋은 쪽이나 나쁜 쪽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최악이다 싶은 순간조차 행운은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루이 암스트롱처럼 끝장나게 노래한다.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파리, 이탈리아 하면 왠지 기분이 들뜬다. 막상 가면 별의별 일이 다 생겨 역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지만 그래도 파리라는 고유명사를 떠올리며 우울할 보통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우아한 여인이나 매사에 섬세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남자가 동행한다면, 매일 드나드는 집처럼 뻔한 행복을 탈출하고픈 욕망이 생긴다. 영화는 정형화된 트로트 멜로디처럼 빤한다. 하지만 나는 중년의 ..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
애플 디자인을 총괄한 조너선 아이브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었다. 애플이 출시한 아이팟은 브라운 휴대용 라디오처럼 군더더기를 제거한 미니멀한 디자인이었다. 입이 저절로 벌어질 만큼 혁신이 돋보였고 유용했다. 쉽게 싫증 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폰에 내장된 계산기 앱 디자인처럼 디터 람스에 대한 오마주였다. 걸출한 장인의 디자인은 복잡한 요소와 구조를 과감하게 덜어내는 자기 철학을 지키면서, 조잡함은 단호히 거부하는 고집 또한 꺾지 않으나, 언제나 실용적이다. 오래 곁에 두어도 세련된 맛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크다. 낡아도 쓸만하다. 대단한 솜씨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며 칼럼을 쓴 임미리 교수와 게재한 경향신문 등을 민주당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 칼럼은 한 개인의 편협성과 언론사의 정파성이 맞아떨어져 나온 결과물이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안철수 씨 정치 세력화에 참여한 이력을 가진 그녀가 SNS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과는 다르게 언론 게재 칼럼은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름을 응원하진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자. 공직선거법 위반이 분명하고, 자신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지나치게 확신한 그런 글에 비위가 뒤틀리더라도, 그것까지도 민주주의다. 그것 없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름지기 그런 기묘한 주관을 대범하게 인정하는 상식과 교양이, 가짜와 무도한 선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킨다. 칼럼..
CJ 이미경 부회장의 수상 소감에 대해 말이 많네. 언젠가 봉 감독이 말했어. 결혼하고 생활이 곤란할 때는 대학 동기가 쌀을 가져다줘서 살았대. 한때는 너무 힘들어서 자살까지 생각했다더군. 그런 그를 누가 구했을까, 예술? 아니 그에게 투자한 투자가와 자본이었일 거야. 재능만으론 안 돼. 예술가가 밥벌이에 매달리지 않아야 더 좋은 작품이 나와. 먹고 살 길이 보이지 않아서, 오로지 먹고사는 데에만 함몰되면 사람도, 상상력도, 작품의 풍요성도 위축돼. 고흐나 이중섭은 가난해도 예술혼을 꽃피웠지 않냐고? 그래서 그들은 일찍 죽었지. 가난해서. 예술이 자본을 이끄는 게 아니라 자본이 예술을 견인해. 돈이 봉 감독에게 창작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예술성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듯, 잉여 자본이 문화를 만드는 거야.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