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분류 전체보기 (199)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숙명여대 사건은 페미니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나 차별받았어요!" "나 힘들었다고요!" "상처받은 내 맘 좀 알아달라고요!" 등의 정서를 육화하며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 용기 있게 자신을 드러낸 사람들 덕분에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치부가 드러났다. 반면 페미니즘 담론이 폭증하면서 정체 모를 분노가 페미니즘의 외피를 입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예리한 흉기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일부 극단 페미니스트들의 미러링이 확산하더니 이젠 모두를 향해 나도 힘들었으니 너도 차별받으라며 혐오한다. 여성만이 가장 큰 피해자이고 약자라고 전제한, 자기 설움에 과잉 몰입한 이들이 전혀 정량화할 수 없는 그 감정만으로 판단을 내려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러는지 ..
한 줄로 압축한 제목은 <결혼 이야기>인데 실은 이혼 이야기다. 결혼의 진척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조금씩 실망하는 과정이거나 이혼까지를 포괄하기 때문인 듯하다. 대신 우울하지 않다. 극 중 '애덤 드라이버'는 직업이 연출가이고 '스칼렛 요한슨'은 배우다. 남편은 부인에게 자기..
이 영화 좋다. 실제 인물과 매우 흡사한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의 연기는 두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은 상반된 성격을 가졌다. 각자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고집스러운 원칙이 있어서 상대를 향해 쓴소리하거나 눈살을 찌푸린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원인을 캐묻고 답을 요..
소설 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 첫 문장 바로 앞서 작가는 '하는 말', 즉 서문을 썼다.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 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눈을 부릅뜨고 객기를 부리는 글이 있다. 선 굵고 점잖은 어휘를 골라 쓰지만 음흉한 속내가 빤히 비치는 글도 숱하다. 그..
진중권 씨가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는다면서도 최근 자신의 행위는 '부패한 친문 측근들' 때문이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이번에도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부패한 집단권력에 맞서는 비범한 개인, 즉 투사로 셀프 격상하는 목적에 충실했다. 못된 인간들이 그런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런다고. 사랑해서 때린다고." 윤석열 총장도 언제는 자기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더니 대통령에 대한 충정은 변함없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 말은 복잡해도 본질은 단순하다. 다 행위와 결과로 드러난다. 진중권 씨는 자신이 오랜동안 "국이"라고 부르던 친구 가족에게 행하는 폭력을 정의와 결기로 포장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자신만을 향하고, 자기 존재 증명 강박에 갇히는 일인칭 언어는 타인을 가..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
세상 일은 척 보면 다 안다는 듯 떠드는 진중권 씨는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그는 종편 패널과 보수 언론서 현 정부 공격용으로 활용되지만, 사실 진중권 씨는 그 자신이 몹시 무시하는 김어준 같은 영향력이 1도 없다. 그가 경쟁심을 느낄 유시민 작가처럼 베스트셀러를 연달아 써내지도 못한다. 조국 교수처럼 언제든 돌아갈 명문대 정교수 자리도 없다. 그렇다고 힘들 때 잘 뭉치는 '문빠'같은 지지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나의 주관적인 가정은 아무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그의 주장처럼 미천하기 짝이 없다. 김어준 씨는 주류가 주도권을 거머쥔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 힘으로 새로운 언론 유형을 만들었다. 그는 전통언론의 비아냥 속에서 청취율 1위 프로그램을 일구며 현실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까지 왔다..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첫문장의 첫인상이 강렬하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과학과 문학과 철학을 적절히 아우르는 낭창낭창한 글을 썼다. 일테면 절친과 술한잔 하면서 우리 현실이 얼마나 엉뚱한지를 신나게 떠..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박경리 작가가 1973년 6월 3일 밤에 쓴 서문 중 마지막 문단이다. 2001년 작가는 2002년 판 서문을 아래 문단으로 시작한다.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