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합의된 공감 (123)
명멸하는 장면의 집합
에드바르 뭉크 , 1984-1985, 115×152㎝, Oil on canvas. 그녀가 취했다. 지친 마음을 술 몇 잔에 헹궜을까. 남에게는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술 마신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숙취가 찾아온다. 그 고통은 과음과 정비례한다. 함부로 분위기에 취해, 감히 삶과 사랑과 사람 따위를 사랑하며 자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취기와 숙취 또한 깊다. 오슬로 국립박물관장이 이 그림을 구매할 당시에 박물관 후원자 중 한 사람이 따졌다. "오슬로 국립박물관은 술 취한 여자가 쉴 곳이 아니다." 그러자 박물관장은 기자 회견을 열어 그림처럼 호소력 있는 언어로 반박했다. "이곳이 쉴만한 곳인지 아닌지는 그녀가 깨어나면 물어보겠다. 그러나 지금은 자게 내..
감천동 / 문인수 부산 감천항을 내려다보는 산비탈, 감천동 문화마을 골목길들은 참, 온통 애 터지게 좁아요. 그중에서도 거리 병목 같은 데 한토막은 어부바, 어느 한쪽 벽에다 등을 대고 어느 한쪽 벽엔 가슴을 붙여 또 하루 비집고 들고 나야 그러니까, 게걸음질을 쳐야 어디로든 똑바로 향할 수가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큰길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두사람. 몸뻬 차림의 뚱뚱한 여자가 부스스한 머리, 키가 껑충한 사내더러 이죽거리며 잔뜩 눈 흘려요. "술 좀 대강 처먹지!" "왜, 내가 또 잠 못 들게 했나?" 게 골목, 그 통로를 경계로 둔 건너편 집과 건너편 집. 밤중, 사내의 헛소리며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친 여자. 여자의 지청구와 사내의 대꾸가 정류장에 나온 이웃 사람들 모두 낄낄낄 웃게 하지만 오랜 ..
가을 아욱국 / 김윤이 방고래 딛고 어머니가 들여온 밥상 아욱국이 입안에서 달금하다 날마다 재봉틀 앞 허리 굽혀 앉은뱅이하다 가끔씩 펴고 일어나 가꾼 것들이다 동네 아낙들의 시샘 속에도 오가리가 들지 않고 푸릇하니 살이 올랐다 빈 북실에 실을 감듯, 두엄으로 길러낸 아욱잎엔 ..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 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문태준 시집 『맨발』중 전문 하나둘 싹을 내밀던 보리가 제 모습을 얼추 갖추며 나날이 여문다. 청보리밭 살펴 가는 바람은 아마 마파람일 것이다. 그때의 곡식은 그 바람에 든 습기를 먹고 큰다. 같이 사는 짐승도 식구다. 비가 온다고 사람이 그들을 챙긴다. 사람의 고민은 한쪽으로만 치우친다. 성치않은 제 몸이 먼저 심란할 사람이 비스듬하게 지나간다. 농사는 돌보기의 시작인데, 그가 거름을 챙겨 땅을 돌보아준..
화학반응 / 박철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박철 시집 『없는 영혼에도 끝은 있으니』중 전문 언어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을까. 이를 달리 말하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천 냥으로도 갚을까 말까 한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토씨 하나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한마디 말은 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며 세상을 달라지게 할만큼 힘이 세다. 사람은 언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비가 오는 날과 볕이 많은 날은 기분부터가 다르다. 아침과 저녁때의..
정읍 장날 / 고광헌 아버지, 읍내 나오시면 하굣길 늦은 오후 덕순루 데려가 당신은 보통, 아들은 곱빼기 짜장면 함께 먹습니다 짜장면 먹은 뒤 나란히 오후 6시 7분 출발하는 전북여객 시외버스 타고 집에 옵니다 배부른 중학생, 고개 쑥 빼고 검은 학생모자 꾹 눌러써봅니다 어머니, 읍내..
만금이 절창이다 / 문인수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은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정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문인수 시집 『배꼽』중 전문 ..
바퀴 / 문인수 말복날 수륜리(水輪里) 유원지엘 갔다. 우리는 계곡물 콸콸거리는 어느 식당 숲 그늘에 자릴 잡았다. 물가 여기저기 네모난 살평상을 박아놓고, 그러니까 급류의 속도를 최대한 붙잡아놓은 집이다. 하지만 유수 같은 세월, 희끗희끗 달아나는 물살이다. 옆자리 살평상엔 중늙은이 아주머니 넷이 먼저 와 앉아 있다. 닭백숙에 소주도 두어 병 곁들여 조용히 복달임하는 중.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세월이라는 것이 흐를까, 계곡물 소리는 여기저기 커다랗게 엎딘 바위들도 연속, 험하게 잡아채 제 속도에 매단다. 그래도 그 소리 듣지 않으면 가지 않을 세월, 아주머니들은 음식상을 치우게 하고 각기 웅크리고 눕는다. 머리꼭대기에 발바닥, 머리꼭대기에 발바닥…… 친한 사이끼리 일생일대를 잇대며, 그러나 모..
역모 / 전병석 내일이면 엄마는 퇴원한다 형제들이 모였다 엄마를 누가 모실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큰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양원에 모시자 밀랍처럼 마음들이 녹는다 그렇게 모의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던 작은 형수 전화가 숨 넘어간다 어머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며...... 퇴원 후를 걱정하던 바로 그 밤 자식들 역모를 눈치챘을까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셨다 전병석 시집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중 전문 시인은 어렵게 말하지 않는데 너무 빤한 우리 속내가 무참히 드러난다. 내 부끄러움도 시 속에서 또렷하다. 진실은 이렇듯 쉽게 표현될 수 있다. 사실, 자식을 키우는 자식들은 이미 구차한 변명을 여럿 마련해 놓았다. 우리는 우리가 낳은 자식 없이는 살 수 없어도 늙고 병든..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콩국물을 샀다. 집에 돌아와 물을 끓이고 국수를 삶았다. 냉장고를 열어 오이를 꺼내 채썰고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잘랐다. 길어온 콩국물을 붓고 새싹채소를 약간 곁들여 고명으로 얹었다. 내리 며칠 콩국수를 먹었다. "이열치열이지!" 유명 삼계탕집과 고깃집에는 사람들이 늘어섰다. 철들며 수없이 목..